[세대공감 Harmony/이 사람이 사는 법]‘시 쓰는 낚시터지기’ 김용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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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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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말고 가족과 함께 인생을 낚아보세요”

《낚시터는 인간 군상(群像)의 집합소다. 정치인, 기업가, 실직자 할 것 없이 낚싯대 하나 손에 쥔 채 시간과 싸우는 고요한 전쟁터다. 그는 1998년 충북 음성군의 한 저수지에 터를 잡고 낚시터를 꾸렸다. 저수지의 붕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 갔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정지화면처럼 앉은 강태공의 등을 몇 년이나 봤을까. 문득 사람, 낚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차고 넘쳤다. 말주변이 없어 글자로 꾹꾹 자신의 생각을 그렸다. 문장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용철 씨(54)는 낚시터를 운영하는 시인, 시를 쓰는 낚시터지기가 됐다.》

삶의 그림자, 외로움

왜 가느냐고 묻는다면
말하리라 내 안에 가두어 놓은 일상의 욕심
푸른 호수에 방류하러 간다고

-‘낚시터 가는 이유’중에서.




경남 하동군 출신인 김 씨는 도시에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서울에서 의류매장 인테리어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동안에도 항상 고향을 꿈꿨다. 하루 종일 돈 이야기만 하는 서울사람이 싫었고 그 사람들에 질려가는 자신의 모습도 싫었다.

정신없는 서울의 삶에 조금씩 지쳐가며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김 씨는 시간의 대부분을 유년기를 추억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개천을 떠돌며 피라미를 건져 올리던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어릴 때부터 낚시를 참 좋아했어요. 옛날 시골에 놀이라고 할 게 있나요. 산 다니고 물 다니고 하면서 곤충이나 물고기 잡는 게 유일한 놀이였죠. 서울에서 생활하니까 그때가 너무 그리워지더라고요.”

김 씨는 다시 ‘시골’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이라 부르며 서울에서 도망쳤다.

이왕이면 자신의 취미였던 낚시를 하며 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전국 각지를 돌며 풍경이 좋은 저수지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흘러들어 온 곳이 충북 음성군이었다. 산세와 저수지의 형태가 어릴 적 고향과 묘하게 닮아 발길을 붙잡았다. 저수지 이름은 대곡지. 김 씨는 대곡의 우리말인 큰골을 낚시터의 이름으로 쓰기로 했다. 1998년의 일이다.

서울에서 결혼한 아내와 아들도 함께 내려왔다. 시골에서 낚시터를 운영하며 가족이 함께 유유자적하길 바랐다. 그러나 태어난 뒤 서울을 떠난 적 없는 아내에게 시골생활은 고문과 같았다.

“낚시터가 산 아래에 있다 보니 벌레가 무지하게 많아요. 여름이면 말도 못하죠. 오죽하면 저수지에서 물고기가 아닌 벌레를 키운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가뜩이나 시골생활이 힘든 아내에게 벌레가 기폭제가 된 거죠. 1년도 못 견디고 짐 싸서 아들이랑 서울로 올라갔어요.”

그때부터 김 씨는 사무치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북적거리는 서울이 싫어 시골로 왔지만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내려니 사람이 그리워졌다.

서울에서처럼 멍하니 있는 시간이 또 많아졌다.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붕어의 지느러미질에 저수지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도, 계절마다 산이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낚시에서 사람을 보다

한 끼 허기가 목숨 값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손가락에 박힌 질긴 인연의 바늘 빼내고서야
도락의 대가는 오래오래 후끈거린다는 것을
직장에서 잘려나간 김 부장의 가슴앓이가

-명치끝에 전해온다 ‘감원’ 중에서.

3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일도 어느 정도 손에 익고 혼자 시간을 다스리는 법도 조금씩 익혀 갔다.

취미도 하나 생겼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 낚시터를 찾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의 인생을 혼자 곱씹어봤다. 밤을 지새우는 강태공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배우는 날도 많아졌다. 그들도 나처럼 외롭구나 싶으니 위안도 됐다.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더라고요. 각기 다른 방법으로 나름의 생을 살아요. 낚시터를 열고 만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우주를 종합해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더라고요.”

그에게 물은 지상의 데칼코마니(종이 위에 물감을 바르고 종이를 접었다 펴거나 다른 종이를 붙였다 떼는 회화기법)다. 하늘로 솟은 산이 있는 것처럼 물 아래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높은 산에 사람이 살지 않듯 깊은 물에도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낚시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는 과정이었다.

15년간 그 현장을 지켜보며 낚시와 인생이 닮아 있는 걸 깨달았다. 낚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떠졌다. 그간 관찰해 온 사람들과 낚시를 접목한 낚시론(論)도 생겼다.

‘붕어가 입질하지 않는 것은/배가 부르기 때문이 아니다/배고파 밥 먹고/배불러도 또 먹고/게걸스럽게 삼키는 인간의 무한 탐욕을/깨우치기 위함이다’ ‘붕어는 욕망을 삼키지 않는다’ 중에서.

그는 낚시를 욕망을 다스리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욕망을 버릴수록 월척을 낚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낚시를 처음 하는 사람은 낚싯대가 길수록, 바늘이 클수록, 떡밥이 클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해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죠. 떡밥이 크면 물고기가 깨물어 먹어요. 한입에 확 물어야 바늘이 입에 걸리는데. 낚시 초보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욕심만 내죠.” 낚시는 질긴 생명력을 절감하는 작업이라고도 덧붙였다.

“물고기를 낚아 올릴 때 쓰이는 미끼는 손가락 마디보다 작아요. 낚시터의 물고기는 뭘 먹고 살까요? 사람이 주는 떡밥을 먹고 자라는 거예요. 낚이지 않는 고기는 사람이 고기를 낚기 위해 던진 떡밥을 먹으며 사는 것이죠. 이상하지 않아요? 낚아 올리려 던진 떡밥으로 물고기가 연명한다는 게.”

드디어 시집을 내다

돈 되는 것 아니고
먹을거리 구하는 것도 아닌데
가방 하나 벗하여 호수로 향하는

-주말 낚시 가족 ‘낚시 가족’ 중에서.

그는 낚시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 밤샘낚시를 하는 강태공과의 술자리는 즐겁지만 너무 짧았다.

글을 배운 적 없지만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글로 쓴다면 보다 많은 사람이 그의 낚시론을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낚시터라는 공간과 낚시터를 찾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시로 읊조렸다. 2008년 첫 번째 시집 ‘태공의 영토’가 나왔다. 2년 뒤인 2010년에는 두 번째 시집 ‘지느러미로 읽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한창 시를 쓰고 있을 때 서울에서 가족이 내려왔다. 낚시를 좋아하던 사람이 낚시터를 꾸리고 낚시에 대한 시를 쓰자 아내는 백기를 들었다.

“아내도 제가 몇 년 못 견디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거라 생각했나 봐요. 그런데 낚시에 대한 시를 쓰고 앉았으니 아내도 두 손 두 발 다 든 거죠 허허.”

가족과 다시 마주하자 외로움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낚시만큼 외로운 일도 없지만 낚시꾼들도 가족과 함께한다면 덜 쓸쓸할 것 같았다. 그는 낚시터 곳곳에 자신이 썼던 시를 내걸었다.

수상좌대에도, 낚시터를 한 바퀴 도는 산책로 초입에도 시가 적힌 팻말을 세웠다.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상방갈로도 직접 설계해 설치했다.

“남편이나 아빠가 혼자 낚시를 떠나면 가족 대부분은 싫어하죠. 그런데 낚시를 다녀오면 사람은 인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거든요. 그것을 저는 시로 만들었고요. 요즘에는 제가 이렇게 말해요. 여기 올 때 가족들 다 데리고 오라고. 물고기를 잡고 제 시를 읽고 딱 하루만 있으면 낚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저는 믿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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