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太 예술허브 꿈꾸는 싱가포르 아트위크]<하>예술로 도시 브랜드 높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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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로 변신한 버려진 병영… 도심의 아이콘 되다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 군대의 주둔지로 조성된 길먼 배럭스가 이 나라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곳곳에 흩어진 막사 건물마다 갤러리와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미술애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싱가포르=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 군대의 주둔지로 조성된 길먼 배럭스가 이 나라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곳곳에 흩어진 막사 건물마다 갤러리와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미술애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싱가포르=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싱가포르의 명동 격인 오처드 거리에서 멀지 않은 ‘길먼 배럭스’. 영국 식민지 시절 군대 주둔지로 조성된 지역이지만 지금은 울창한 나무와 크고 작은 건물이 어우러진 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지난달 25일 해가 어스름 질 무렵, 세련된 옷차림의 남녀가 이곳에 속속 모여들었다. 막사로 쓰였던 건물들이 갤러리로 변신하면서 다채로운 기획전이 일제히 개막한 것이다.

미국의 산다람 타고르, 독일의 마이클 젠슨, 일본의 오타 파인 아트 등 14개 갤러리가 밀집한 이곳은 떠오르는 문화 명소다. 버려진 병영을 국제미술계의 새 아이콘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경제개발청에서 800만 달러(약 870억 원)를 들여 ‘길먼 배럭스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 지난해 9월 1차 입주한 갤러리들과 식당이 문을 열었다. 올해 안에 미술관도 문을 열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에서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국가의 지원, 자국 중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를 포용하는 열린 사고를 접목했다는 점에서 우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 창조적 인구를 유치하는 문화 인프라

길먼 배럭스에 자리한 일본 미즈마 갤러리의 전시장.
길먼 배럭스에 자리한 일본 미즈마 갤러리의 전시장.
길먼 배럭스의 15에이커(6만702m2) 용지엔 1930년대 건물을 포함해 14개동이 흩어져 있다. 영국이 물러난 뒤 1971년부터 싱가포르군이 사용했으나 1990년대 이후 방치돼 왔다. 궁리 끝에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이곳을 창조산업의 거점으로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건물마다 서너 개씩 갤러리들이 들어섰는데 해외 화랑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현대미술의 폭넓은 흐름을 짚을 수 있다. 미국 개념미술가 존 발데사리의 텍스트 작업부터 싱가포르 신인의 영상작품까지 색깔 다른 전시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지역 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인도네시아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자주 찾는 데다 전시를 보고 작품을 즉석에서 구매하는 중산층 고객도 늘고 있어 전망은 밝은 편이다.

외국 작품들 틈새에 문경원 임자혁 김소연 이진주 등 한국의 여성 작가를 조명하는 ‘소녀시대’전이 눈길을 끈다. 서울 문래동 ‘솜씨’에 이어 이곳에 ‘cottonseed’를 개관한 김정연 대표가 꾸민 전시다. 그는 “따로 알리지 않아도 정부의 대대적 홍보 덕에 길먼 배럭스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한국 시장은 기복이 많지만 이곳은 규모는 작아도 안정적이고, 세계적 화랑과 나란히 우리 화랑을 알릴 기회여서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 세계적인 작가를 유혹하는 예술공간

예술로 도시 브랜드의 품격을 높이려는 노력은 STPI(싱가포르 타일러 프린트 인스티튜트)에서도 엿보인다. 허물어지는 창고를 개조해 2002년 개관한 STPI는 정부 지원을 받는 비영리 기관으로, 판화공방 갤러리 작가스튜디오와 아파트를 갖추고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데이비드 호크니 등 거장의 판화를 제작한 미국의 판화장인 케네스 타일러와 협력해 유명 작가들이 머물 수 있는 창작공간을 만든 것이다.

STPI는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1년에 6명의 작가를 초청한다. 이들은 종이와 판화에 관한 기술 자문부터 작품 제작, 전시까지 원스톱으로 해결되는 공간에 4주간 머물면서 시각적 어휘를 넓히게 된다. 영국의 리처드 디콘, 인도의 투크랄&타크라, 일본의 다바이모, 한국의 전광영 서도호 양혜규 씨가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했다.

요즘 에르메스와 협업한 일본 사진가 히로시 스기모토의 스카프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도 꽤 유명하다. 에미 유 갤러리 대표는 “우리는 상주 작가에게 새로운 개념과 경험을 제공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며 “예산의 30%는 정부 지원, 나머지는 자체 수입으로 해결하는데 올해는 아트스테이지 싱가포르, 아트바젤, 아모리 등 해외 아트페어에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홍콩이 시주룽(西九龍)에 대규모 복합문화단지 건립을 추진하는 것처럼 싱가포르의 길먼 배럭스 프로젝트도, STPI도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국가적 관심의 산물이다. ‘아트 허브’를 선점하기 위한 아시아 대표 도시들의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는 가운데 한국, 또 서울의 좌표는 어디쯤일지 고민해볼 시점이다.
▼ “우리 활동은 예술과 공동체를 잇는 중매쟁이” ▼
‘플랫폼 프로젝트’ 공동설립자 사비타 압티와 샤린 카타르
     

‘플랫폼’의 공동설립자 샤린 카타르(왼쪽)과 사비타 압티 씨. 싱가포르=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플랫폼’의 공동설립자 샤린 카타르(왼쪽)과 사비타 압티 씨. 싱가포르=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싱가포르의 ‘플랫폼 프로젝트’는 현대미술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아시아의 문화지형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만든 비영리 사회공헌 단체다.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 현장에서 만난 공동설립자 사비타 압티 씨와 샤린 카타르 씨는 자신들의 활동을 “예술과 공동체 사이를 맺어 주는 중매쟁이”라고 소개했다.

압티 씨는 미술사가 겸 큐레이터, 카타르 씨는 사업가 출신 미술 애호가이다. 이들은 펀드전문가 크리스틴 필스버리 씨와 함께 2011년 ‘플랫폼’을 조직했다. 역사는 짧지만 폭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한 다방면의 예술 지원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플랫폼은 공공기관 상업갤러리 컬렉터 학계 기업을 두루 이어 주는 역할을 지향한다. 국제 기획전의 후원과 대형 작품의 제작 지원, 아카이브 구축, 국제 예술포럼 개최를 진행한다. 지난해 시작한 레지던시 후원 사업의 경우 한국의 양혜규 씨를 첫 작가로 선정하는 등 아시아 미술의 활성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카타르 씨는 “우리 목표는 예술에 대해 관심은 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할지 정보와 경험에 목마른 기업과 컬렉터를 문화프로젝트와 연결해 주는 것”이라며 “개인이나 기업의 기부금을 받아 컬렉터와 일반인에게 현대미술과 친숙해지는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압티 씨는 “예술 후원은 돈이 아니라 열정과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라며 “우리 활동이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개인과 기업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다”라고 자랑했다.

싱가포르=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플랫폼 프로젝트#예술공간#길먼 배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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