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함께 읽고 얘기하는 동안 어머니는 아프지 않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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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전행선 옮김/440쪽·1만5000원·21세기북스

“너는 할 만큼 했단다. 정말 나한테 충분히 해줬단다.” 췌장암에 걸려 투병하는 어머니(왼쪽)는 2년간 함께 책을 읽어온 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 책은 삶의 여정이 끝나가는 여성과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어머니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남성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에 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21세기북스 제공
“너는 할 만큼 했단다. 정말 나한테 충분히 해줬단다.” 췌장암에 걸려 투병하는 어머니(왼쪽)는 2년간 함께 책을 읽어온 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 책은 삶의 여정이 끝나가는 여성과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어머니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남성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에 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21세기북스 제공

2007년 11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암병동 대기실. 췌장암 말기 환자인 어머니(73)의 화학치료에 동행한 중년의 아들(50)은 긴장된 마음을 달래려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어머니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윌리스 스테그너의 ‘안전함을 향하여’를 읽고 있다고 답한다. 하이퍼론 출판사 편집장인 아들은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장기인 직업을 가졌지만, 어머니에게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집에 돌아와 읽은 이 책은 초반부터 주인공이 암으로 죽어가는 소설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아들과 어머니는 병원 대기실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읽은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회원이 단 둘뿐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북클럽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나눈 대화와 용서, 화해의 기록이다. 신비스러운 책의 힘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혼돈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췌장암 말기 환자의 평균 생존수명은 6개월. 어머니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2년 가까이 살아남았다. 이 기간에 두 사람은 거의 50권에 이르는 고전 시 소설 희곡 미스터리 논픽션 등 광범위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처럼 얇은 책을 골라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마이클 토머스의 ‘추락하는 남자’ 같은 두툼한 소설도 읽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결코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일 뿐이었다. 처음엔 얇은 책을 읽다가 긴 책을 읽기로 했다는 것은 어쩌면 희망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장편소설을 읽으려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아주 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어머니와의 북클럽 대화에서 가장 꺼렸던 주제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책은 어머니가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왔고, 아들에겐 당신이 없는 삶을 꾸려갈 채비를 갖출 수 있게끔 이끌어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책 한 권을 다 읽어냈다는 데서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아들은 다음에 함께 읽을 책을 고르면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저자 윌 슈발브와 췌장암 말기 환자였던 그의 어머니가 함께 읽은 책들의 표지. 왼쪽부터 존 업다이크의 단편집 ‘내 아버지의 눈물과 그 밖의 이야기들’과 월리스 스테그너의 ‘안전함을 향하여’,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등이 보인다. 21세기북스 제공
저자 윌 슈발브와 췌장암 말기 환자였던 그의 어머니가 함께 읽은 책들의 표지. 왼쪽부터 존 업다이크의 단편집 ‘내 아버지의 눈물과 그 밖의 이야기들’과 월리스 스테그너의 ‘안전함을 향하여’,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등이 보인다. 21세기북스 제공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어머니의 침대에서 메리 와일더 타일스턴의 책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발견한다. 1884년 출간된 이 책은 표지가 떨어지고, 곳곳에 얼룩이 지고 누렇게 퇴색돼 있었다. 아들은 “읽기는 실천하기의 반대말이 아니란다. 그건 죽음의 반대말이야”라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낸다.

어머니인 메리 앤 슈발브는 젊은 시절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하버드대 입학처장, 뉴욕 돌턴스쿨의 대학 진학 전문지도교사를 역임한 교육자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미얀마 등 전 세계 27개국을 돌며 난민구조활동을 한 맹렬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병상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 도서관을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탈레반에 억류된 뉴욕타임스 기자가 무사히 풀려나도록 기도하길 멈추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화학치료를 받는 암환자가 죽는 날까지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과도한 슬픔 끝에 맞는 허망한 죽음에 비하면 부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해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함께 책을 읽는 소중한 기회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소통할 책이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찾아보면 분명히 있을 것이다. 7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초중생 자녀가 읽어드릴 수 있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저자는 “우리가 읽는 각각의 책은 늘 삶의 마지막 선정 도서가 될지 모르며, 각각의 토론 역시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내 인생의 마지막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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