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를 움직인건 황금보다 종말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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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무대로 근대 세계사 해석해온 주경철 교수, 콜럼버스의 마음속을 항해하다
정신세계 해독한 저서 내년초 출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에게 바다란 ‘오트로 문도(otro mundo)’, 즉 또 다른 세계다. 바다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이 역사학자의 글은 그래서 넓고 새롭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에게 바다란 ‘오트로 문도(otro mundo)’, 즉 또 다른 세계다. 바다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이 역사학자의 글은 그래서 넓고 새롭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에스파냐(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어 1492년 8월 신대륙 항해에 나섰다. 대서양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10월이 되자 지친 선원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며 선장 콜럼버스를 닦달했고, 콜럼버스는 이렇게 응수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그렇게 죽음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막대한 돈을 벌거나 신분 상승을 꾀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죽음을 감행할 수는 없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거친 파도를 앞에 두고 산타마리아호의 닻을 올린 걸까.

‘대항해시대’(2008년) ‘문명과 바다’(2009년) 등에서 바다를 무대로 근대 세계사를 해석해 온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52)가 이번에는 콜럼버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해외로 팽창하는 유럽의 최선두에 서 있던 콜럼버스의 마음을 탐구함으로써 당시 유럽의 정신 구조를 해독해 보는 작업이다. 최근 집필을 마친 신간 ‘신비주의자 콜럼버스’(가제)는 서울대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총서의 첫 권으로 내년 초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주 교수는 “콜럼버스는 마지막 중세적 인간이자 최초의 근대적 인간”이라며 “콜럼버스로 대표되는 유럽인이 낯선 문명을 만나자마자 칼을 휘두르며 지배하던 공격적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콜럼버스에 대해서는 현대의 벤처투자자처럼 ‘부를 찾아 모험한 세속적 인간’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그런데 최근 해외 학계에서는 종교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콜럼버스의 새로운 면모가 연구되고 있다. 주 교수는 콜럼버스가 작성한 ‘예언서’와 항해일지 등을 바탕으로 그가 종말론에 빠져 있었다고 분석했다. 콜럼버스는 세계의 운명에 대한 종말론적 대서사시를 지어 국왕에게 바치려 했으며, ‘예언서’는 그러한 작업 과정에서 자료를 모으고 코멘트를 단 모음집이라는 것이다.

“15세기 스페인에는 종말론이 퍼져 있었는데, 하느님이 미천한 사람을 골라 신의 일을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게 자신이라고 믿었고요. 그는 아메리카 대륙(그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이 아시아라고 믿었다)을 지상낙원(에덴동산)이라 생각했고, 고전 독서를 통해 인류 종말까지 150년이 남았다고 결론 내렸어요. 신대륙에서 금을 얻어 십자군을 일으킨 뒤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일, 그것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역할이라고 믿은 거지요.”

콜럼버스의 항해는 곧 ‘신의 계시이자 인류 구원의 첫 단계’였던 셈이다. 콜럼버스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은 스페인 왕의 몫이며 자신은 그 일을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주 교수는 “콜럼버스는 출세나 자손의 귀족화 같은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종교적 목적을 가졌었다”며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움이 혼재했던 것은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콜럼버스를 보는 시각은 정체된 유럽을 벗어나 신대륙을 향해 나아간 근대적 영웅, 또는 원주민을 학살하고 약탈한 서구 제국주의의 대표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주 교수는 “과거의 인물을 정치적 요구에 따라 단편적으로 왜곡해서 볼 게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보려 했다”고 말했다.

기존의 대륙 중심이 아닌 바다를 중심으로 근대 세계사를 천착해 온 주 교수에게 바다란 무엇일까. 그는 ‘오트로 문도(otro mundo·또 다른 세계)’라는 스페인어로 답했다. “육지를 떠나 바다라는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면 익숙한 것도 다르게 보입니다. 바다란 저로 하여금 틀을 바꿔 생각하게 만드는 키워드입니다.”

다작을 해온 주 교수의 꿈은 언젠가 유토피아니즘(utopianism·공상적 이상주의)의 역사를 책으로 써내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에만 급급하지, 무엇이 이상적 사회인지, 이상적 사회를 위해 국가와 사회는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어요. 역사적으로 어떤 유토피아를 꿈꿔왔고 그 시도는 어땠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지금 역사가가 할 일이 아닐까요.”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콜럼버스#서양사#주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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