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다

  • Array
  • 입력 2012년 10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리움, 현대미술 거장 아니시 카푸르 개인전

인도 출신으로서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아니시 카푸르는 지금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강렬한 색채로 완성된 ‘노랑’(1999년)은 거대한 단색조 회화이면서 안으로 움푹 파인 음의 공간을 가진 조각이기도 하다. 또한 미술품이면서 벽면을 활용한 건축물의 일부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인도 출신으로서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아니시 카푸르는 지금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강렬한 색채로 완성된 ‘노랑’(1999년)은 거대한 단색조 회화이면서 안으로 움푹 파인 음의 공간을 가진 조각이기도 하다. 또한 미술품이면서 벽면을 활용한 건축물의 일부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이 전시에선 겉으로 드러난 물질의 형태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주목해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15t 무게의 녹슨 쇳덩어리도, 오목거울처럼 속이 파인 조각들도 비어있는 음(陰)의 공간을 품고 있다. 보이는 것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초대하는 작업이다. 흙으로 만든 그릇도 속이 비어있어 쓰임을 갖는다는 장자의 사유를 떠오르게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현대미술의 거장 아니시 카푸르(58)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원색 안료를 사용한 초기작부터 핵심적 작업인 ‘보이드(Void)’ 연작, 73개 스테인리스 스틸 공을 쌓아올린 신작까지 18점을 아우른 자리다. 인도 뭄바이 태생의 작가는 1973년 런던으로 건너가 미술교육을 받은 이래 영국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 참여했고 1991년엔 권위 있는 터너상을 수상했다. 올해 런던 올림픽의 기념조형물 ‘궤도’ 역시 그의 작업이다. 미국 시카고에 자리한 거대한 콩알 같은 ‘구름 대문’은 국내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야외조각 작품이다.

전시에선 동서양의 미학과 철학, 현대적 조형언어가 삼위일체를 이룬 작가의 내공이 빛을 발한다. 작품 이해와 상관없이 고요하고 명상적 작품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년 1월 27일까지. 5000∼8000원. 02-2014-6900

○ 환상적인 색채, 경이로운 공간

(위)아니시 카푸르의 ‘동굴’은 그 속에 담긴 어둠의 공간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아래)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공으로 완성된 대형 조각 ‘큰 나무와 눈’.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위)아니시 카푸르의 ‘동굴’은 그 속에 담긴 어둠의 공간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아래)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공으로 완성된 대형 조각 ‘큰 나무와 눈’.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전시에선 색채와 공간이 마법을 부린다. 힌두 사원에 쌓인 가루물감에서 영감을 얻어 출발한 그의 안료작업은 강렬한 색상으로 압도한다. 6m 크기의 ‘노랑’(1999년)은 안으로 파인 공간과 함께 회화와 조각, 건축의 경계를 넘나든 작품이다. 전시에 맞춰 내한한 작가는 “색채는 물질적 재료이면서 비현실적 요소”라며 “물질성과 심리적 조건 사이에 위치한 점에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녹슨 쇠로 만든 대형 조각 ‘동굴’(2012년)과 더불어 그를 대표하는 ‘보이드’ 시리즈는 물질로 비물질의 세계를 드러낸다. 짙푸른 안료로 만든 3개의 반구와 오목거울 형태의 조각에 담긴 내부의 빈 공간이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다양한 작업에선 반사이미지가 두드러지는데 “내 작업은 거울 자체에 머물지 않고 거울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라며 “오목거울은 끝없는 자기 반복이 일어나는 점에서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벽면을 예리한 칼로 베어낸 듯한 ‘도마의 치유’(1989년), 실제 미술관 바닥을 동그랗게 뚫어버린 ‘땅’(1991년), 흰 벽면이 불룩 앞으로 튀어나온 ‘내가 임신했을 때’(1992년) 등은 작품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무너뜨린다.

○ 아름답고 숭고한 창조의 공간

작가는 “작품 속 공간은 어둡고 빈 공간이 아니라 창조의 공간, 시적인 공간”이라며 “비우면 비울수록 더 많은 것이 담긴다. 비운다는 것은 곧 채운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음과 양, 존재와 부재, 비움과 채움 등 이질적 요소를 수렴한 그의 작업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오묘한 융합을 선물한다.

‘블랙박스’ 공간엔 여성의 창조성을 주목한 창조의 공간이 꾸며졌다. 12m 크기의 왁스로 만든 ‘나의 붉은 모국’(2003년)은 대형 해머가 느리게 움직이며 왁스를 부수는 행위의 궤적이 작품이다. 작가 손을 거치지 않고 자생적으로 탄생한 작품은 그가 주장해온 ‘자가생성’ 개념을 구현한 것으로 인간이 알 수 없는 우주 탄생과 자연의 섭리를 성찰하게 한다. 성적인 에너지를 무궁한 창조의 원동력으로 해석한 ‘나의 몸 너의 몸’과 ‘스택’도 흥미롭다.

야외에선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사각의 오목거울이 왜곡된 이미지를 비추는 ‘현기증’엔 어지러운 혼돈의 감각이, 릴케 시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대형 조각 ‘큰 나무와 눈’엔 유동적이고 풍성한 시적 상상력이 살아 숨쉰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리움#아니시 카푸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