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피란와서 연극제? 한 번 해봐라!”교장선생님 허락에 연극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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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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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바꾼 순간- 임영웅의 6·25

임영웅은 일본프로야구의 숨은 고수다. 54년 전부터 라디오로 일본 방송의 프로야구 중계를 들었다. 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13일 산울림 소극장에서 막이 오른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임영웅은 일본프로야구의 숨은 고수다. 54년 전부터 라디오로 일본 방송의 프로야구 중계를 들었다. 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13일 산울림 소극장에서 막이 오른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뙤약볕 아래 휘문중 3학년 임영웅(78·극단 산울림 대표)은 쭈그려 앉았다. 일신국민학교(1973년 폐교·현 서울 중구 충무로3가 극동빌딩 자리) 운동장에는 거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청장년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1950년, 인공(人共)치하 한 달째 서울. 공산당 학생동맹 간부로 보이는 한 청년이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그를 학교 건물 뒤편으로 데려간 청년이 후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영웅아, 인마. 밖으로 나돌지 말고 집에 숨어 있어.” 두 달여 뒤, 서울은 수복됐다.그는 살았고, 북한 인민군에 강제 징집된 나머지 사람들은 생사를 몰랐다. 그의 학교 선배였던 청년은 죽었다. 》
○ 기상천외

지금 생각해 봐도 엉뚱한 일이다. 휘문중·고교는 부산 대청동 언덕배기에 4칸짜리 판잣집 교사(校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952년 10월, 엄연한 전시(戰時)였지만 전황(戰況)은 휴전선 부근만을 맴돌았다. 그렇다 해도 전란을 피해 부산에 온 학교가 가을 연극제를 여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휘문고 2학년 연극반 임영웅은 생각이 달랐다. ‘아니, 피란 왔다고 못해? 졸업한 선배들한테 돈을 걷어 치르면 되지.’

“그 생각을 당시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추진해 봐라’ 그러시더라고요. 보통은 ‘안 돼. 피란길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연극이야’ 이러잖아요?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아. 나중에 되짚어 보니까 그게 교육 아니었나 싶어.”

선배들과 부딪쳐 거절당해 보면 현실을 알게 되고, 일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철없던 그의 계획이 희한하게도 맞아떨어졌다.

처음 찾은 학교 선배는 당시 재무장관 백두진 씨(1908∼1993)였다. 부산 보수동 임시 정부청사로 무작정 가서는 장관 비서실에서 죽치고 기다리기를 2시간여. 화장실을 가러 나오는 백 장관에게 외쳤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들뻘 후배를 알 리 없었지만 장관은 그가 입고 온 교복을 보고 말했다. “어, 안에 가서 기다려.” 찾아온 취지며 연극 이야기며 이런저런 대화가 훌쩍 한 시간을 넘겼고 그는 장관에게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역을 하시면 딱 좋겠습니다”라고 농까지 던지게 됐다. 결국 연극제 예산 100만 원 가운데 50만 원을 희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음은 월탄 박종화 선생(1901∼1981)이었다. 10만 원을 주마고 한 월탄 선생은 부산에서 외과병원을 하는 이근영 씨를 소개해줬다. 초량동 ‘이근영 외과’로 찾아간 그는 여기서도 10만 원을 받았다. 이 양반이 그가 흠모하던 당대 연극인 이해랑 선생(1916∼1989)의 부친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이처럼 천방지축 같은 그의 추진력으로 휘문고는 그해 11월 부산 영도의 남도극장에서 ‘전의앙양(戰意昻揚)연극제’를 올렸다. 작품은 그가 선정하고 기성 연출가가 연출을 맡은, 영국 작가 로버트 셰리프의 ‘전호’(戰壕·원제 ‘여로의 끝’)였다. 물론 연출료도 지불했다.

“역발상이기 때문에 성공한 것 같아. 제주도나 거제도로 피란가야 되는 거 아니야 걱정하던 때에 ‘연극으로 모교의 명예를 드높이겠다’고 했으니 상식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였어요.”

○ 별격(別格)

휴전 직후 고3이던 그는 동랑 유치진 선생(1905∼1974)이 관여하던 한 주간신문에서 주최한 고교 연극반장 좌담회에 참석했다. 평소 생각했던 연극에 대한 견해, 부산 피란시절 연극제를 올린 경험을 이야기하고 나니 유치진 선생이 그를 불렀다. “자네, 연극 공부 좀 하지.” 당대 연극판에서 ‘하느님’ 같은 존재였던 동랑 선생의 한마디가 그로 하여금 본격적인 연극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임영웅이 바로 연극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상당한 ‘외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키지 않았지만 성적은 그런대로 나와 서울대 상대 시험을 봤지만 떨어진 뒤 더욱 그랬다. 자신이 3세, 12세 때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읜 그의 집안은 음악가문이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동양의 베니 굿맨’이라 불리며 일본, 중국에서 재즈 밴드를 이끌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그의 숙부 중 한 분은 서울예고를 만들고 KBS교향악단을 창설한 지휘자 임원식 선생이었고, 막내 숙부 역시 자신의 악단을 이끌었다. 아들들이 모두 음악에 빠져 지내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던 그의 할아버지는 당신이 사실상 맡아 키우던 손자가 음악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미친 듯이 연극과 영화를 봤어요. 1950년 국립극장이 생겨서 처음 올린 ‘원술랑’부터 다 보고. 음악이야 워낙 집안에 널려 있었고, 웬만한 문예잡지도 다 섭렵했지요.”

동랑 선생의 그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아 서라벌예대 연극과에 들어가서 기성 연극의 조연출도 두어 편 했다. 하지만 몇 년 안 돼 그는 신문사 문화부 기자가 됐다. 1963년 동아방송이 개국하자 라디오 PD로 들어가 드라마를 연출했다. 1967년에 프리를 선언하고 회사를 나와 연극 연출에 몰두하고자 극단 ‘산울림’도 만들었지만 1973년 한국방송공사(현 한국방송 KBS)가 출범하자 다시 PD로 입사했다. 1992년까지 제작위원으로 일하며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다 연극협회이사장이 되면서 퇴직했다. 그런 중에도 1980년대 공전의 히트작 ‘위기의 여자’를 연출했고 한국의 각종 연극연출상을 섭렵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작가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공연해 극찬을 받기도 했다.

“신문기자를, 방송사 PD를 죽을 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내 본거지는 어디까지나 연극이고 연극으로 돌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극단이 자리 잡을 때까지, 내가 스스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좀 돌리자는 거였지.”

KBS에서 그는 별격으로 통했다. 유례없는 투잡(two-job)을 뛰니 당연히 시샘을 받았다. 하지만 PD로서도 프로그램을 잘 만드니 흠 잡힐 일은 적었다. 1980년대 초반 이원홍 사장이 “임영웅 같은 연출가가 KBS에 있다는 게 영광 아니야?”라고 한마디 하자 주위의 볼멘소리도 잦아들었다.

○ 연극은 괴물

그는 1969년 한국 최초로 자신이 무대에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해 17번째로 다시 연출한다. 연극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누릴 것도 다 누려본 임영웅이지만 여전히 연극은 어렵다. “작품 할 때마다 좌절이지. 열심히 만들었는데 관객이 안 오는 것보다 더 큰 좌절이 어디 있어?” 그래서 제일 신날 때가 흥행 생각하지 않고 다른 극단에서 객원으로 연출할 때란다. 그럼에도 중요하는 것은 연극은 자신이 하고 싶어 택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연극은 괴물이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은 기본이다.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올려야 진짜 연극이고 예술이다. 열심히 하면 100점 만점에 80∼85점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연극(예술)은 99점, 100점을 지향한다. “그래서 연극이 미묘하고 (기분) 더럽고 그런 거지.”

1985년 그가 연극에 대한 배수진을 치는 기분으로 산울림 소극장을 지었을 때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용도 변경 불가의 집을 지었다”고 했다. 극장 말고 다른 공간으로 쓸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임영웅은 여전히 무대를 응시한다. (연극 연출의) 최고는 누구냐고 그에게 물었다. “누가 제일이냐는 없어. 누가 괜찮은 연출가냐 이런 거지.” 알 듯 말 듯 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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