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체가 뛰어난 그래픽… 글꼴의 우수성 널리 알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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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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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화예술제 참여 타이포그래피스트 안상수 교수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씨가 카메라를 향해 한쪽 눈을 가렸다. 1988년 잡지 창간호 표지용 얼굴 사진을 찍으면서 별 뜻 없이 한쪽 눈을 가리고 찍은 게 계기가 돼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전 세계인들의 얼굴을 한쪽 눈을 가린 채 찍고 있다. 일명 ‘원 아이 프로젝트’다. 옆에 보이는 것이 ‘안상수체’로 도안한 자신의 얼굴이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씨가 카메라를 향해 한쪽 눈을 가렸다. 1988년 잡지 창간호 표지용 얼굴 사진을 찍으면서 별 뜻 없이 한쪽 눈을 가리고 찍은 게 계기가 돼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전 세계인들의 얼굴을 한쪽 눈을 가린 채 찍고 있다. 일명 ‘원 아이 프로젝트’다. 옆에 보이는 것이 ‘안상수체’로 도안한 자신의 얼굴이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한글이 우수하다는 건 글꼴의 우수함을 얘기하는 겁니다. 한글만이 의도를 가지고 과학적인 토대 위에서 (발성기관을 본떠) 디자인된 글자입니다. 한글은 꼴과 기능이 한몸이죠.”

타이포그래피스트, 아니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씨(60)에게 한글은 디자인이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도 ‘디자이너’ 이도(李도), 세종이다. 그는 “우리 겨레의 가장 창의적인 디자인이 한글이고, 한글날처럼 구체적이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또렷이 드러내는 유쾌한 국경일을 가진 나라는 없다”고 했다.

‘유쾌한 국경일’인 한글날에 즈음해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대 생활관 4층 그의 연구실 ‘날개집’을 찾았다. 12일 울산에서 열리는 한글문화예술제 ‘한글, 디자인 상상력을 말하다’에서 할 강연을 준비 중이었다.

“한글은 글자 자체가 그래픽이에요.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글자이죠. 들여다볼수록 문화적 자부심이 느껴지는 한글 형태의 힘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연구실 입구에 붙여놓은 부적 두 장이 눈길을 끌었다. 올 1월 타계한 한국화가 유양옥 선생이 생전에 선물로 그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의 연구실에 붙여놓으니 부적도 훌륭한 그래픽같이 보였다. 기다란 탁자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그 위의 그래픽이 눈에 들어왔다.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이다.

“2007년 독일 라이프치히 시가 주는 구텐베르크상을 받았어요. 수상자들은 ‘구텐베르크 갤럭시’라는 시리즈의 책자를 한 권씩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올 3월 ‘세종과 구텐베르크 사이’라는 독일어 책을 출간했죠. 훈민정음에서 한자를 모두 지워 묶고, 책 말미에 훈민정음 독일어 번역본을 붙여 만들었습니다.”

구텐베르크 갤럭시 시리즈는 책의 판형이 구텐베르크 42행 성서의 판면과 크기가 같아야 하고, 표지에 수상자의 생월 별자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제한 조건이 있다. 그는 물병좌이지만 “우주의 상징인 북두칠성이 더 맘에 들었다”고 했다.

구텐베르크상은 서적예술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그가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은 데는 1985년 발표한 ‘안상수체’의 힘이 컸다. ‘고딕과 명조의 독재를 끝장냈다’는 얘기를 듣는 안상수체는 초성, 중성, 받침의 모양과 크기가 어느 위치에 있든 모두 같다. “시각 디자인의 기초가 타이포그래피입니다. 자연스럽게 글자체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첫 닿자(자음)를 끝소리에 다시 쓰고 홀자(모음)도 자릿값을 갖는다는 훈민정음의 원리를 따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디자인이 나온 겁니다.”

그에게 한글은 그래픽의 소재이자 일상어이다. 약속 시간을 정할 땐 “쇠날(금요일) 늦은 3때(오후 3시) 뵐까요?”라고 한다. ‘날개집’이라는 ‘당호(堂號)’도 좋아하는 작가인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따왔다. 아들은 ‘ㅁ’을 돌림자로 써 미르와 마노, 손자와 손녀는 ‘ㅂ’을 써서 비롯과 빔으로 지었다. “일상생활에선 한글 전용론자예요.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한자를 모르면 큰 보물을 잃는 것과 같지요. 한자는 동양의 라틴어잖아요. 이 터전에서 나온 신생 글자가 한글이고요.”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씨의 대표작 ‘피어랏 한글’. 나뭇가지 위에 그가 좋아하는 자음인 ‘ㅎ’을 꽃처럼 그려 넣었다. “보기 드문 조형 능력과 특출한 감수성을 가진 타이포그래퍼”라는 구텐베르크상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안상수 씨 제공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씨의 대표작 ‘피어랏 한글’. 나뭇가지 위에 그가 좋아하는 자음인 ‘ㅎ’을 꽃처럼 그려 넣었다. “보기 드문 조형 능력과 특출한 감수성을 가진 타이포그래퍼”라는 구텐베르크상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안상수 씨 제공
그의 여러 직함 중 하나가 서울국제타이포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글자를 소재로 한 세계 유일의 비엔날레다. 2001년 그가 제안해 처음 열렸고, 10년 후인 2011년 부활했다. 그는 3대째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내년 9월경 열리는 제3회 행사는 문학과 타이포그래피의 융합을 주제로 펼쳐질 예정이다.

올 8월 정년을 5년 남겨두고 그는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라는 직함을 내려놓았다. 타이포그래피를 전문으로 하는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어서다. “네덜란드 타이포 공방을 참고해서 구상하고 있어요. 메이저만 있는 세계보다는 작은 대안이 존재하는 세계가 문화적으로 건전하다고 믿습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안상수#타이포그래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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