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복지법’ 모호한 기준… 받아야할 사람 못받고 엉뚱한 사람이 챙겨갈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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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 시행 앞둔 ‘예술인복지법’… “기대 못미쳐” 현장선 우려의 목소리

《 최근 ‘예술인복지법’이 문화예술계 화제의 중심에 섰다. 다음 달 18일 시행을 앞두고 생활이 어려운 예술가들의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예술인복지법은 지난해 1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생활고로 숨진 뒤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 생계 등을 법으로 보호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제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이 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 안은 고용 환경과 경제 여건이 어려운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책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시행 한 달여를 앞두고 우려가 크다. 전문가 공청회마다 “준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열린 문화부 국정감사에서도 이에 대한 질의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이 법의 혜택을 받게 될 현장 예술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연극배우, 독립영화 감독, 인디밴드 뮤지션 등을 만나 예술인복지법에 바라는 바를 들어보았다.

※취재에 응한 이들은 생활수준 공개와 정책비판 등에 대한 부담을 들어 가명 사용을 요청했다. 》
○ 대학로 연극배우, “저도 예술인인가요?”

5일 오후 2시 서울 혜화동 대학로 내 한 지하극장. 무대 위엔 배우 4명이 연습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기자가 예술인복지법과 관련해 한마디를 청하자 연습 중이던 연극배우 강혜영(가명·33) 씨는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다”라는 말부터 꺼냈다.

2004년 연극배우를 시작한 강 씨는 매년 대학로에서 3편 이상 공연을 해왔다. 현재도 낮에는 새 작품 연습을 하고 밤에는 현재 공연 중인 연극 무대에 선다. 몸이 힘들어도 가능한 한 많이 공연을 한다. 공연 한 편당 받는 출연료가 30만∼50만 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강 씨는 “보통 두 달 연습하고 한 달 공연하니 1년에 세 편 이상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달에 10만∼20만 원 내외를 버는 셈. 아예 출연료를 못 받는 배우도 많다. 문화부 예술인 실태조사에서 평균 월수입이 아예 없는 예술인이 3명 중 1명꼴(37.4%)인 것으로 조사됐다.

강 씨는 “생활이 어렵다 보니 법 제정 당시부터 예술인복지법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예술인복지법의 혜택을 받으려면 ‘대통령령으로 창작, 실연(實演)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2조)에 포함돼야 한다. 이 조항에 기초해 문화부가 만든 시행규칙안을 보면 분야별 예술인 기준이 나와 있다(표 참조). 강 씨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3편 이상의 공연에 출연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연극 분야 예술인 조건에 부합된다. 하지만 강 씨는 “기준대로라면 주변에 혜택을 받지 못할 동료 연극인들이 허다하다. 분장, 무대조명 등 정말 지원이 필요한 현장 스태프는 다 제외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 다른 연극배우 김주희(가명·36) 씨는 아예 예술인복지법 대상이 못 된다. 그는 3년 전만 해도 대형 뮤지컬에 출연할 정도로 업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근 2, 3년 간 출연 섭외가 없었다. 김 씨는 “출연 섭외를 못 받으면 예술인이 아닌 건가요”라고 물었다. 대학로에서는 예술인복지법 기준이 느슨해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예술인이 피해를 볼 것이란 우려도 컸다. 연출가 A 씨(36)는 “삐끼(호객꾼)를 동원한 코미디쇼나 상업주의가 판치는 누드 연극이 많고 이들이 돈을 가장 많이 번다”며 “그럼에도 현 예술인복지법 기준으로는 이들도 지원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 충무로 영화감독, “산재보험료 낼 돈 없어요”

“좋다가 말았어요.” 3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만난 독립영화 감독 김주한(가명·36) 씨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투 잡(two job) 인생’을 살아왔다. 2005년부터 영화 연출부 생활을 시작한 후 총 12편의 독립영화에서 조연출, 촬영 등을 맡아왔다. 지금은 자비로 단편 독립영화를 제작 중이다.

“스태프 8명의 식사비가 80만 원, 주연배우 개런티로 10만 원 식으로 계속 돈이 들어요. 지자체 홍보영상을 만들어주는 아르바이트로 제작비를 마련 중입니다. 지원이 필요한데….”

김 씨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4대 보험 지원책. 특히 산재보험이 절실했다. 영상산업 종사자는 촬영현장에서 다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술인복지법 시행에 따라 다음 달 18일부터 예술인도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업무상 재해를 당하면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나머지 3개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은 예술인복지법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나마 산재보험료도 100% 본인 부담이다. 김 씨는 “보험료 낼 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더구나 예술인복지법에 따른 지원 폭도 축소된 상태. 법 시행과 함께 예술인복지사업을 위탁, 운영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지만 예산 부족으로 내년에는 △예술인 900명에게 3개월간 월 100만 원의 창작준비금 지원 △1500명에게 예술 관련 무료 교육과 월 20만 원(3개월간) 지원만 시행된다. 창작자금을 빌려주는 예술인 복지금고 같은 구상은 제외됐다.

○ 홍대 인디뮤지션 “투명하게 지원해 달라”

6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만난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이효철 씨(가명·33)는 “법이 시행돼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예술인들이 배제될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 해 평균 30∼50회 공연을 열지만 월수입은 ‘제로’에 가깝다.

“공연당 2만∼3만 원을 받는데 연습실비와 식비로 쓰면 남는 돈이 없어요. 예술인 기준에 들려면 ‘3년 동안 공연 3회 이상 출연하거나 1장 이상 음반을 낸 자’여야 하는데 이게 대중음악계 현실과 맞지를 않습니다. 앨범작업 기간이 갈수록 길어지거든요. 저 역시 앨범 준비로 2년 가까이 집에서 작업 중입니다.”

이 씨는 이어 “‘공연’ 기준을 봐도 작은 클럽 공연도 포함되는 건지, 일정 규모 이상의 공연인지 구체적 기준이 없다”며 “큰 공연을 한 사람만 제대로 된 공연을 했다고 인정받아 지원 대상이 되면 인디 뮤지션들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 18일 예술인복지재단 산하에 심사위원회가 생긴다. 위원회는 예술인복지 지원을 요청하는 예술인을 심사하게 된다. 자칫 심사가 특정 분야에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예술인복지법에서 순수예술은 문학, 미술, 음악, 국악, 무용 등으로 나눠진 반면 대중문화는 드라마, 가요, 코미디 등을 모두 아울러 ‘연예’ 분야로 합쳐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현장 예술인들의 지적도 나왔다.

:: 예술인 복지법 ::

지난해 1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생활고와 지병 속에서 월세방에서 숨진 것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 제정된 법이다. 일명 ‘최고은 법’으로도 불린다. 고용환경이 불안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문학, 미술, 사진, 건축, 국악, 무용, 연극, 연예, 영화 분야 가난한 예술인들을 지원한다. 지원 대상은 예술인복지법 시행규칙 기준에 따라 예술인임을 증명한 사람이다. 다음 달 18일 시행되며 이 법과 관련된 본격적인 지원사업은 2013년 1월부터 시작된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에술인복지법#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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