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박경리의 연애소설, 달콤하기보다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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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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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63년 대구일보 연재 장편 ‘그 형제의 연인들’ 9월 말 단행본으로 나와

소설가 박경리의 장편 ‘그 형제의 연인들’ 첫 회가 실린 대구일보 1962년 10월 2일자. 당시 박경리는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으며 작가로서의 외연을 넓혔고 7년 후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에 들어가게 된다. 마로니에북스 제공
소설가 박경리의 장편 ‘그 형제의 연인들’ 첫 회가 실린 대구일보 1962년 10월 2일자. 당시 박경리는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으며 작가로서의 외연을 넓혔고 7년 후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에 들어가게 된다. 마로니에북스 제공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사진)가 서른여섯에 쓴 연애소설은 어떤 색깔일까. 작가가 1962년 10월 2일부터 1963년 5월 31일까지 대구일보에 연재한 장편 ‘그 형제의 연인들’이 탈고 49년 만인 이달 말 단행본(마로니에북스)으로 나온다.

이 소설은 한때 연구자들 사이에서 미궁(迷宮)에 빠진 작품으로 통했다. 강원 원주 ‘박경리문학공원’, 경남 통영 ‘박경리문학관’의 자료나 각종 문학전집의 작품 연보에 전남일보 연재작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 소설이 실린 신문은 찾기 힘들었던 것. 2004년에야 논문 ‘해방 이후 대구·경북지역 신문연재소설에 대한 발굴조사 연구’(한명환 외 3인)를 통해 대구일보에 연재된 사실이 확인돼 작품의 실체가 드러났다.

출간 과정도 고역이었다. 1960년대 대구일보는 디지털화 작업이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출판사 직원들이 직접 대구로 내려가 경북대와 영남대 도서관, 대구시립중앙도서관 등을 돌며 일일이 당시 종이신문을 사진으로 찍은 뒤 타이핑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203회로 마감한 연재소설을 결호 없이 찾아내 200자 원고지 1200여 장 분량으로 묶어냈다.

‘…연인들’은 달콤한 연애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관습적으로 용납되기 힘든 인간관계를 중심 줄기 삼아 안타깝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사랑을 다루되 그 성취 과정을 보여주기보다는 사랑을 위한 희생에 초점을 맞춰 애잔한 비애가 가득하다.

줄거리를 압축하자면 성격이 판이한 한 형제의 못 다한 사랑 얘기다. 형 심인성은 냉철한 의사로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다 곧 죽음을 앞둔 여성 환자 규희를 만나면서 사랑에 눈을 뜬다. 반면 열혈 대학생인 동생 주성은 친한 친구의 누나이자 이혼녀인 혜원에 빠져 괴로워한다. 두 형제가 관습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을 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이 밀도 있게 펼쳐진다.

단행본 작업에 참여한 조윤아 가톨릭대 ELP(Ethical Leader Path) 학부대학 교수는 “이 작품은 사랑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관습의 문제마저 인간의 내적 성숙과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사랑을 이루려 하는 이보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자의 고귀함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한 박경리는 1969년 집필을 시작한 토지에 몰두하기 전까지 각종 신문과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며 왕성한 필력을 뽐냈다. ‘…연인들’은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던 박경리 문학의 초반기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연인들’을 연재하면서 한국일보에 장편 ‘가을에 온 연인’(1962년 8월 18일∼1963년 5월 31일)을 함께 게재한 것도 이채롭다. 이를테면 ‘겹치기 연재’다. 조 교수는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그 형제의 연인들’과 괴기스러운 느낌의 ‘가을에 온 연인’을 함께 연재한 것은 작가의 놀라운 창작력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평가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박경리#연애소설#그 형제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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