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수련도’ 속 하늘하늘 춤추는 군자들의 축제 정겨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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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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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꽃, 연꽃 그림

‘수련도’(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비단에 채색, 380.0X98.5cm. 연잎의 다양하고 선율적인 흐름이 압권인 작품이다. 바람결에 춤추는 연꽃들의 자태는 감미로운 교향곡을 듣는 듯 아름다운 음률과 같다.
‘수련도’(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비단에 채색, 380.0X98.5cm. 연잎의 다양하고 선율적인 흐름이 압권인 작품이다. 바람결에 춤추는 연꽃들의 자태는 감미로운 교향곡을 듣는 듯 아름다운 음률과 같다.
《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 연못에서는 너르고 푸른 잎 사이로 희고 붉은 연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오른다. 여름의 꽃, 연꽃이다. 계절별로 집 안을 꽃그림으로 치장한다면 봄에는 모란, 여름엔 연꽃, 가을엔 국화, 그리고 겨울에는 매화가 적절하다. 연꽃은 비록 한 철을 풍미하는 꽃이지만 그 이미지는 오래전부터 매우 다양하게 활용돼 왔다. 고분벽화로부터 시작해 와당, 금속공예, 나전칠기, 불상, 불화, 승탑, 석비, 청자, 백자, 분청사기, 자수, 단청, 회화에서 무늬로든 그림으로든 그 쓰임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
○ 방 안에 설치된 행복의 연못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연꽃그림을 모두 불교적인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많은 연꽃 이미지가 불교와 관련이 있고 사찰에도 온갖 연꽃 이미지가 장식돼 있다. 이렇듯 불교가 연꽃을 대표적인 상징으로 삼게 된 이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닮았기 때문이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맑은 꽃을 피워낸다. 진흙탕은 인간의 욕망으로 오염된 속세를 뜻하고 맑은 꽃은 진리의 빛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민화나 일반 회화에 등장하는 연꽃은 불교와 상관이 없다. 군자(君子)의 꽃이요 행복의 꽃이다.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周敦이·1017∼1073)는 연꽃을 ‘군자의 왕’이라 했다. 진흙을 묻혀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의 모습을 유교의 이상적인 존재인 군자의 자태에 비유한 것이다. 같은 특징을 보고도 유교와 불교의 해석이 서로 다른 셈이다.

민간에 와서는 상징이 더욱 복잡해진다. 무엇과 짝을 짓느냐에 따라, 또는 연꽃 자체의 모습이 어떠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연꽃과 물고기가 짝을 이루면 풍요를 상징한다. 물고기의 어(魚)자와 여유롭다는 뜻의 여(餘)자가 중국어 발음이 ‘위(yu)’로 같기 때문이다. 병(甁)과 평(平)이 모두 핑(ping)으로 발음돼 꽃병(花甁)이 곧 평안(平安)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본보 5월 26일자 B5면 참조).

연씨인 연과(蓮顆)의 발음 ‘롄커(li´ank ̄e)’는 연달아 과거에 합격한다는 뜻인 연과(連科)와 같다. 그래서 까치나 물총새가 연밥을 쪼아 먹는 그림은 과거시험에 연속해서 합격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연꽃이 무더기로 자라나 있는 그림은 연꽃의 왕성한 번식력을 닮아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들은 결국 행복이란 키워드로 귀결된다. 그러니 연꽃병풍을 방 안에 놓으면 그 공간은 곧 ‘행복의 연못’이 됐다.

○ 다채로운 조형 세계

‘연꽃그림’(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종이에 채색, 37.2cmX90.4cm. 여름 막바지의 풍경을 밝은 채색과 맑은 선묘, 그리고 천진난만한 이미지로 밝고 명랑하게 표현했다.
‘연꽃그림’(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종이에 채색, 37.2cmX90.4cm. 여름 막바지의 풍경을 밝은 채색과 맑은 선묘, 그리고 천진난만한 이미지로 밝고 명랑하게 표현했다.
가장 아름다운 연못을 표현한 명품으로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수련도’를 꼽을 수 있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연꽃들의 자태는 마치 감미로운 교향곡 선율을 듣는 것 같다. 줄기에 비해 잎이 유난히 크지만 춤추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연꽃과 갈대는 연잎 위로 솟아오르면서 화면의 흥을 돋운다. 천변만화하는 연잎의 율동은 보는 이의 오감을 상쾌하게 한다. 이 그림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꽃이 아닌 잎인 셈이다.

도쿄의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연지유어(蓮池遊魚)’는 현대적 조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무겁게 짓누르는 연잎 두 개가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다. 이런 중량감을 상쇄해 주려는 듯 연봉오리가 우주선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다. 맨 아래부터 연꽃의 줄기가 4, 3, 2, 1 순으로 줄어들면서 상승감을 높여준다. 연봉오리는 가볍게 좌우의 위로 뻗어 올라가 줄기와 상응하고 있다. 수평 방향으로 묵직하게 자리한 이미지와 수직 방향으로 가볍게 상승하는 이미지가 그림 안에서 절묘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이 풍경과 상관없이 연꽃 아래에는 풍요의 상징인 물고기 두 마리가 한가롭게 노닌다. 묵직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작품이다.

일본인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연꽃그림’은 동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하늘을 향해 다투듯 치솟은 연꽃 줄기들의 윤곽선을 점선으로 처리해 가볍게 상승하는 느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꽃잎들은 하나둘 떨어지고 연잎마저 무거운 듯 고개를 꺾고 있다. 이러한 연꽃의 힘겨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는 마지막 꽃술을 빨고 오리와 물고기는 생명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가을의 길목에 선 늦여름의 경치이지만 전혀 쓸쓸함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밝은 채색, 맑은 선묘, 그리고 천진난만한 모습 때문이리라.

민화 속의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 아니다. 조선의 이념인 유교와 서민의 길상(吉祥)적인 바람이 서려 있는 군자의 꽃이자 행복의 꽃이다. 아울러 그 이미지도 각양각색이다. 아름다운 선율의 화음을 보여주는 연잎, 우주선처럼 솟구치는 연봉오리, 맑고 명랑하게 표현한 연꽃 등 다채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소재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
#수련도#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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