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류 진화, 뜨거운 주제들]구석기 시대, 노령인구 늘어나 예술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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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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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와 동굴 암각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3만 년 전에 그려진 프랑스 쇼베동굴 벽화. 사자들이 들소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쇼베동굴 벽화에는 손바닥 자국이나 발자국, 그리고 상징적인 기호들도 그려져 있다. 동아일보DB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3만 년 전에 그려진 프랑스 쇼베동굴 벽화. 사자들이 들소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쇼베동굴 벽화에는 손바닥 자국이나 발자국, 그리고 상징적인 기호들도 그려져 있다. 동아일보DB
한국에서 한동안 영화 ‘은교’가 큰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노년의 삶과 사랑에 대한 논의도 많이 진행된 듯합니다. 한 사회가 성숙할수록 그동안 소외됐던 다양한 삶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됩니다. 노년의 삶도 그중 하나겠지요.

노년의 삶은 인류학에서도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인류의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면서부터, 다시 말해 노년의 삶을 얻게 되면서부터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은 예술을 낳았습니다. 현생 인류를 친척 인류들과 다른 문화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장수는 다산(多産)에 도움이 될까

인류에게는 다른 동물에 비해 아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오래 산다는 점입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장수하도록 진화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오래 사는 건 좋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잘 따져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화에 가장 유리한 속성은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장수가 진화에 도움이 되려면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과 연관이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여성은 50세를 전후해 폐경이 옵니다. 배란주기가 끝나면 더이상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습니다. ‘효율’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폐경 이후의 상태를 굳이 오래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은 폐경기 이후 인간 여성처럼 오래 살지 않습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고자 인류학자들은 “노인들이 간접적으로 자손 번식을 도왔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바로 폐경기 이후의 여성이 자녀(특히 딸)의 자식을 돌본다는 ‘할머니 가설’입니다. 할머니들이 직접 자손을 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손주들의 생존 확률이 높아지게 함으로써 그만큼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많이 전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을 주장하는 인류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처음 등장한 200만 년 전에 노년기가 처음 나타났다고 봤습니다. 그 근거는 두뇌와 몸의 크기였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두뇌와 몸집이 큽니다.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성장이 오랜 기간 천천히 이뤄진 증거로 봅니다. 마침 이 시기에 인류는 뿌리식물을 채집하기 위한 도구를 발달시켰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육체적 부담이 큰 활동을 못하는 할머니들이 경제활동을 한 근거로 봤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할머니 역할’을 한 여자들이 그렇지 않은 여자들보다 특별이 많은 자손을 남기지는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할머니 가설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 저는 미국 센트럴미시간대의 레이철 카스파리 교수와 함께 고인류 화석 자료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호모 에렉투스 시절부터 노년기의 삶이 보편화됐다는 할머니 가설의 논리적 허점이 발견된 것입니다.

■노년층 급증과 구석기 문화혁명

연구의 결과 인류의 진화 역사 속에서 노년층의 비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노년기의 등장 시기와 관련해서는 기존 연구와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노년층의 비율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약 400만 년 전 등장)보다 호모 에렉투스에서 더 커졌습니다. 네안데르탈인(약 60만 년 전 등장)의 노년층 비중은 그보다 더 높아졌지요.

하지만 이들 고인류 집단에서는 모두 노년기의 사람보다 청년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노년층이 청년층보다 많아진 것은 후기 구석기 인류 집단(현생인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당시 이전 시대와 비교한 노년층의 증가율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컸습니다. 우리 현생 인류의 시대가 되어서야 인류의 수명이 본격적으로 길어졌고, 노년의 생활이 보편화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인류의 문화가 혁명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암각화 등의 예술과 상징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과 상징은 추상적 사고와 연결됩니다. 또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이 있지요. 예술과 상징이 늘어났다는 건 그만큼 정보의 전달이 중요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당시에는 글자가 없어 그림과 기호가 정보 전달의 매체였음). 인류 문화의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노년층의 숫자가 급증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저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오랜 기간 동안의 정보가 모였을 것입니다. 노년층의 지혜를 비롯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는 상징과 예술이 필수적이었겠지요. 후기 구석기 시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징과 예술은 그 당시에 정보의 양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을 나타내 줍니다. 이 주제는 제가 계속 연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또 하나, 평균수명이 늘고 노년층의 수가 더욱 늘어난 현대에도 동시대를 사는 세대의 수가 구석기 시대에 비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평균수명이 50세이던 시대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이 추세대로라면 평균수명이 75세가 된 지금은 증손주가 클 때까지 증조부모가 살아 있어, 4세대가 공존해야 하죠.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칠순이 되도록 증손자는커녕 손자를 보기도 힘듭니다. 예전에 비해 결혼과 출산 연령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100세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인류는 여전히 3세대가 같은 시대를 사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 살게 됐다기보다는 느리게 살게 된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은교’란 영화가 던져준 노년의 삶이란 화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노년 덕분에 탄생하고 발전한 예술이, 다시 노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구석기#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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