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어 한류]<4>한국서 가수 - 직장인 꿈… 아르헨티나의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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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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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내 삶을 흑백서 컬러로 바꿔줬어요”

자매가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스타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언니 빅토리아(오른쪽)는 샤이니의 키를, 동생 다나는 JYJ의 재중을 꼽았다.
자매가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스타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언니 빅토리아(오른쪽)는 샤이니의 키를, 동생 다나는 JYJ의 재중을 꼽았다.
《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거주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자 법률회사 비서로 일하는 빅토리아 로페스 히헤나(22)와 여고생인 다나 로페스 히헤나(17) 자매가 볼에 입을 맞추는 현지식 인사로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
케이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남미한국문화원 한국어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수강신청 기간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신청자들이 긴 줄을 섰다. 중남미한국문화원 제공
케이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남미한국문화원 한국어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수강신청 기간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신청자들이 긴 줄을 섰다. 중남미한국문화원 제공
거실에 들어서자 TV 채널은 한국의 아리랑 TV에 맞춰져 있었다. 자매는 “자랑할 게 있다”며 공부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방안 벽을 가득 채운 건 JYJ를 비롯한 한국 아이돌 그룹의 사진들. 책상에는 한국어 교재가 놓여 있었다. 자매가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섞어 가며 설명했다. “세종학당에서 매주 2시간씩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배운 지 1년 반 됐고요. 유튜브에서 ‘뮤직뱅크’나 ‘강심장’ ‘스타킹’ 같은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서 살아있는 한국어 회화를 익히죠. 다 알아듣진 못하지만.”

서울에서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기자를 위해 특별한 저녁 식탁이 차려졌다. 변호사인 아버지 다니엘 로페스 씨(52)가 만든 엠파나다가 메인 요리로 나왔다. 만두처럼 생긴 엠파나다는 밀가루 반죽 속에 고기와 채소를 넣고 구운 아르헨티나의 전통음식. 독립기념일(7월 9일) 등 명절에 주로 먹는다. 접시가 비워질 무렵 자매가 한국어를 배우게 된 사연을 들려주며 식사 분위기를 돋웠다.

다나는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동생을 따라 세종학당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삼성이나 현대 같은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다나에게 가수의 꿈을 키워준 건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그룹 샤이니였다. 2009년 친구가 유튜브에 올라온 샤이니의 동영상을 소개해줬다. “샤이니의 노래 ‘링딩동’을 듣고 바로 중독됐어요.” 케이팝은 ‘감염’ 속도가 무서웠다. 빅토리아도 동생의 권유로 노래를 듣고는 곧바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나는 케이팝의 가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케이팝은 가사 내용이 긍정적이라 듣는 사람의 마음도 밝아져요. 제 인생이 흑백이었는데 컬러로 변했죠.” 빅토리아는 한국어의 존칭어를 좋아한다. “샤이니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살 차이인 다른 멤버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게 신기했어요. 연장자를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문화가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았죠.”

자매는 한류의 ‘숙주’가 돼 서부 중심도시 멘도사에 사는 사촌들에게 전염시켰다. 사촌 오빠들은 미국과는 다른 음악 스타일에 빠져들었고 소녀시대의 광팬이 됐다. 한국 하면 박지성만 떠올리던 친구들도 자매의 권유로 케이팝을 흥얼거린다.

아버지 로페스 씨는 딸들 때문에 한국 차(무쏘)를 샀다. 그는 “한국 여자 솔로들의 가창력이 좋다. 군무도 뛰어난데,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음식을 특히 좋아해요. 만두, 비빔밥은 최고죠. 김치를 먹으면서 ‘내가 (매워서) 힘들어하면서도 왜 이걸 먹고 있을까’ 생각해요.”

가수의 꿈을 키우던 다나는 2010년 10월 중남미한국문화원이 케이팝 경연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장을 냈다. 그리고 샤이니의 ‘혜야’와 ‘링딩동’을 불러 남미 각국에서 몰려든 90여 개 팀을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꿈에 그리던 ‘케이팝의 성지’를 방문했다. SM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 들러 오디션도 치렀다. 그가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고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제작진이 출연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학업 일정과 맞지 않아 출연은 포기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기획사에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고 싶어요. 주변에서는 말리지만 자신 있어요.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잇는 문화 가교가 되고 싶어요.”

빅토리아는 “동생과 함께 한국에 가서 동생이 안무 짜는 걸 돕고 한국 기업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자매는 현지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어-스페인어 사전을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일본어, 중국어 사전은 시내 서점에 많지만 한국어 사전은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한다고. 동생은 “구글 번역기를 쓰기도 하는데 틀리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언니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현지 어학연수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남미한국문화원 세종학당의 한국어 강의는 빅토리아, 다나 자매를 포함해 90여 명이 듣고 있다. 수강생의 70% 이상은 케이팝과 태권도에 관심 있는 학생과 직장인들이다. 현지 한류 관련 온라인 동호회는 15개가 넘는다. 회원은 4000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문화 선도 국가다. 2006년 11월 중남미문화원을 아르헨티나에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종률 문화원장은 “이탈리아, 스페인 혈통의 백인이 인구의 절대 다수인 아르헨티나는 문화적 자존심이 강하다.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낮은 이곳에서 한국 문화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9시에 시작된 식사는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현지에서는 금요일 저녁 식사는 오후 10시에 시작해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즐기는 게 보통인데, 멀리서 온 손님들을 배려해 시간을 조절했다고 아버지 로페스 씨가 말했다. 식사를 마친 뒤 로페스 씨는 막내딸과 함께 가수 비의 ‘널 붙잡을 노래’를 한국어와 스페인어로 불러줬다.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하모니를 이뤘다.

부에노스아이레스=글·사진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한류#아르헨티나#한국어#케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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