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여러 體로 쓰나 베껴 쓰나 다 알아 맞혀… 위-변조 딱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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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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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 감정 실제로 의뢰해 보니

영화 ‘태양은 가득히’(르네 클레망 감독·1960년)를 아는가. 몇 번이고 리메이크될 만큼 명작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고아 출신인 톰(알랭 들롱 분)은 부잣집 아들 필립(모리스 로네 분)을 부러워하다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필립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톰이 호텔에서 필립의 사인을 흉내 내는 대목. 톰은 필립의 서명을 영사기로 확대한 뒤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따라 그린다. 수없이 반복 연습한 끝에 톰은 결국 친구의 서명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영화에선 서명을 거의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필적 역시 연습을 통해 위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필적 감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성과까지 확인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이런 의구심까지 깔끔하게 지워지진 않았다.

궁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단 하나. 직접 필적 감정을 의뢰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O₂’ 팀원 중 한 사람(S 기자)이 다른 사람(M 기자)의 필적(A4용지에 원고지 2장 분량을 쓴 것·사진 속 ㉯)을 모방해 위조 서류(ⓧ)를 하나 만들었다.

필적을 위조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①다른 사람이 쓴 필적을 보고 반복적으로 연습해서 흉내를 내 쓴 임서(臨書), ②이미 작성된 필적 위에 종이를 대고(유리판 밑에 전등을 켜 밝게 하기도 함) 따라 그리는 투사(透寫), ③위조하려는 글 밑에 종이를 놓고 필기구로 강하게 눌러 기재하면 자국이 생기는데, 그 자국을 따라 필기구로 쓴 골서(骨書)가 그것이다.

S 기자는 처음엔 임서 방식으로 문서를 위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차례 반복해 써도 비슷한 글씨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창문에 대고 비치는 글씨를 종이에 대고 따라 쓰는 투사 방식을 택했다. 창문에 대고 서서 쓰다 보니 글씨를 쓰는 자세에서 원본과 차이가 생겼지만 글의 내용과 종이, 필기구 등은 같은 것을 썼다.

감정을 맡은 양후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문서영상과장에겐 이상의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필적 감정 분야에서 33년 동안 종사한 전문가다. 감정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위조 필적에 대한 소견은 이렇다.

‘일견 안정적 조화 및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필압(筆壓·누르는 힘)이 매우 강함. 또 자획의 시작 부분과 끝 처리 부분이 유연하지 않고 무딘 경직성이 보임. 자획의 강약도 거의 결여돼 매끄러운 리듬이 없고, 주저한 흔적이 관찰됨. 또 문자의 구성 요소를 봐도 간헐적으로 글자를 쓰다 다시 자획을 연결해 기재한 부분까지 드러남. 자획 구성 시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부분에서 일단 멈춘 뒤 다시 기재하는 등 부자연스러운 중단의 결함이 관찰되는데 이는 위조 필적의 고유한 특징임.’

소견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결과도 예상한 그대로였다. ‘ⓧ는 ㉯를 보고 투사의 방법으로 위조한 필적으로 판단됨.’ 결국 톰의 위조 서명도 현대의 수사기법을 적용한다면 가짜로 판명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 사람이 일부러 글자를 다르게 써 보면 어떨까. 그런 것도 잡아낼 수 있을까. 감정을 의뢰할 필적은 ‘O₂’ 팀 M 기자의 것. 상대적으로 글씨가 반듯해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M기자는 우선 위의 실험용으로 쓴 문서(㉯) 외에 2가지 버전을 더 썼다. 정자체로 쓴 것을 ㉮로, 반흘림체로 쓴 것을 ㉯로, 왼손으로 쓴 것을 ㉰로 했다. 가장 자연스럽게 쓴, 평상시 글씨 형태에 가까운 것은 ㉯였다.

버전은 각각 다르지만 동일한 조건을 주기 위해 글의 내용과 종이, 필기구까지 같은 것을 이용했다. 글씨를 쓰는 장소와 작성 시 필자의 자세까지도 같게 했다.

완성 후 3가지 버전을 비교해 봤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엔 전혀 다른 글씨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양 과장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물론 선입견을 개입시키지 않기 위해 3가지 모두 동일한 인물이 썼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감정 결과가 나온 시기는 정확히 이틀 뒤. 고정밀 현미경과 분광기(필적, 인쇄 문자, 여권 등에 있는 잉크의 적외선, 자외선 등을 분석하는 기구) 등을 통해 분석한 결과가 통보됐다.

일단 기본 소견은 이랬다.

‘㉮는 필기 시 의식적으로 신중함을 갖고 쓴 글임. 자획을 분리하여 교범에 의해 작성한 듯 숙련과 안정감, 침착함 등이 균형을 이룬 장체(長體)의 필적임. ㉯에서는 침착함을 갖고 평소처럼 작성한 흐름을 엿볼 수 있으며 활기차고 개성적인 필법 특징이 잘 나타남. ㉰에서는 자획의 운필(運筆) 구성이 규칙적이지 않고, 경직성과 주저한 흔적이 발견됨. 또 자획의 조합이 불안하고, 자획의 시작점과 끝 부분 처리 등에 있어 불균형적인 대칭도 발견됨. 따라서 필기할 때 의도적으로 자신의 필법 특징을 위장하기 위해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쓴 위필(僞筆)로 추정됨.’

기본 소견은 소름끼칠 만큼 정확했다. 그렇다면 핵심 검증 사항인 동일한 사람의 필적 여부까지 확인됐을까.

구체적인 감정 내용이 기본 소견 뒤에 이어졌다. 일단 몇 가지 단서가 달렸다. 필적 검증엔 적어도 원고지 5장 이상의 분량이 필요한데 양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첫 번째. 또 주로 쓰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쓴 필적일 경우 일반적으로 감정 신뢰도가 크게 낮아진다는 게 두 번째였다.

하지만 주어진 자료만 놓고 보더라도 3가지 필적 모두에서 동일한 인물의 잠재된 개성이 발견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후’ ‘습’ ‘실’ 등의 문자와 숫자 ‘8’을 볼 때 그 필순 및 문자의 여백, 밀도 등에서 개인의 희소성 있는 특징이 똑같이 발견된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봐도 균형적인 배열, 띄어 쓰는 습성, 구두점의 특징 등에서 3가지 필적 모두 뚜렷한 공통점이 관찰된다는 의견. 종합한 감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필적에서 보이는 차이점은 상이한 필적이란 결론을 내릴 만큼 근원적인 특징은 아님. ㉮와 ㉰에서는 의도적인 방법을 이용해 다른 구성 요소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발견됨. 눈에 띄는 공통점들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 ㉯ ㉰는 동일한 사람의 필적일 가능성이 큼.’

나름 이런저런 노력을 했는데 동일인이라는 판정을 보란 듯이 내리니 허탈했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에게 새파란 아마추어가 객기를 부린 걸까. 또 한 가지. 나쁜 짓 하고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필적 감정#위-변조#국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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