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고 싶다]<4>못견디게 그리워 검게 타버린 기다림이여… 신안군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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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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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라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흑산도. 구불구불 열두 굽잇길로 이어진 읍동과 예리항이 호수처럼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있다. 왼쪽 앞머리엔 ‘작은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바다연못’도 보인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흑산도는 새모양으로 생겼으며 예리는 ‘새 입’에 해당한다. 곳곳에 전복양식장이 가지런하다. ‘흑산도는 /사람을 기다린다//아득한 수평선/너머로 불꽃보다 뜨거운/그리움이 밀려드는 날/나는 너에게로/너는 나에게로/우리 모두 섬이 되나니//저마다 가슴 깊이/보석 같은 별/하나씩 품고/파도 위에 눕고자 하는/흑산도//흑산도는/꿈을 기다린다’ (허형만의 ‘흑산도’ 전문) 흑산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상라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흑산도. 구불구불 열두 굽잇길로 이어진 읍동과 예리항이 호수처럼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있다. 왼쪽 앞머리엔 ‘작은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바다연못’도 보인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흑산도는 새모양으로 생겼으며 예리는 ‘새 입’에 해당한다. 곳곳에 전복양식장이 가지런하다. ‘흑산도는 /사람을 기다린다//아득한 수평선/너머로 불꽃보다 뜨거운/그리움이 밀려드는 날/나는 너에게로/너는 나에게로/우리 모두 섬이 되나니//저마다 가슴 깊이/보석 같은 별/하나씩 품고/파도 위에 눕고자 하는/흑산도//흑산도는/꿈을 기다린다’ (허형만의 ‘흑산도’ 전문) 흑산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김 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 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 / 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손택수 ‘홍어’에서

흑산도(黑山島)는 ‘검은 뫼’ 섬이다. 멀리서 보면 땅 전체가 하나의 ‘검은 산’이다. 산엔 동백나무 후박나무가 빽빽하다. 사철 짙푸르다 못해 검다. 바다도 깊고 푸르다 못해 진초록이다. 서고동저(西高東低).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서쪽엔 상라산(230m)-반달봉(220m)-깃대봉(380m)-문암산(405m)-선유봉(307m)-옥녀봉(275m)이 등뼈처럼 솟아 있다. 낮은 동쪽엔 모래미(사촌), 여티미(천촌), 푸르미(청촌) 등 기름 자르르한 마을이 엎드려 있다. 논은 아예 없고 비탈 밭이(5.66%) 어쩌다 눈에 띈다.

유배인 정약전은 “흑산이란 말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흑(黑)’자가 주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칠흑의 블랙홀이 두려웠으리라. 그는 흑산을 ‘자산(玆山)’이라고 바꿔 불렀다. 김훈은 그의 소설에서 “玆(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흑)은 너무 캄캄하다. 玆(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玆(자)’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정약전은 실낱같은 빛줄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이다.

흑산도를 보려면 일단 상라산 전망대(230m)에 올라야 한다. 발아래 올망졸망한 섬들이 좌르륵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장도와 망덕도가 보이고 그 너머로 홍도가 아슴아슴하다. 흑산도 코앞엔 대둔도, 오른쪽이 영산도이다. 언뜻 보면 커다란 검은 물고기가 아가리를 벌린 것 같다. 아니 기러기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영산도가 오른쪽 날개이고, 대장도가 왼쪽 날개이다. 홍도와 장도 사이의 대륙붕이 바로 홍어가 마실 다니는 ‘흑산바다밑 둘레길’이다. 홍도 뒤로 미끄덩! 빠지는 저녁 붉은 햇덩이가 황홀하다. 섬 전체가 발그레 물든다. 글자 그대로 ‘홍도(紅島)’가 된다. ‘기다란 섬’ 장도 잔등엔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습지가 있다.

흑산 일주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온갖 볼만한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귀신나무로 불리는 천연기념물 초령목(招靈木) 자생지, 한반도지도바위, 교각이 없는 아슬아슬 하늘도로(480m), 정약전 선생의 사촌서당과 그 코앞에 있는 천주교 공소, 애틋한 전설이 어린 7형제 섬, 최익현 유허비, 샛개해변….

유람선 일주도 빼놓을 수 없다. 풍년학바위, 김삿갓바위, 촛대바위, 공룡바위, 칠성동굴, 쌍용동굴, 사성동굴, 석주대문, 제2금강산…. 가는 곳마다 눈이 동그래진다.

“흑산도!” 가만히 되뇌어보면 서러움이 아련하게 솟아오른다. 홍어(Skate)는 저릿한 두엄냄새로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최근 일본의 한 여행전문사이트에서 발표한 세계의 악취음식리스트에 홍어가 2위를 차지했다던가!(1위는 스웨덴의 청어젓갈 수르스트뢰밍). 정확히 그 암모니아 냄새는 ‘삭힌 홍어’에서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삭히지 않은 싱싱한 홍어회는 인절미를 씹듯 차지고 쫄깃하다. 뼈째 썰어먹는 그 맛은 씹을수록 깊고 은근한 향이 난다. 외국인들은 홍어날개를 즐겨 먹는다.
‘두엄 속에 삭힌 홍어와 해묵은 배추김치/그리고 돼지고기 편육//여기에 탁배기 한잔을 곁들면/홍탁//이른 봄 무논에 물 넘듯/어, 칼칼한 황새 목에 술 들어가네.//아그들아, 술 체엔 약도 없단다/거, 조심들 하거라 잉!’

-송수권의 ‘홍탁-목포삼합’에서

▼ 고려∼조선 유배자, 기록에만 140여명 ▼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와 손바닥 바위에 새겨진 그의 친필 ‘箕封江山洪武日月(기봉강산홍무일월).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와 손바닥 바위에 새겨진 그의 친필 ‘箕封江山洪武日月(기봉강산홍무일월).
흑산도는 유배의 땅. 이미 백제시대 세 왕자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헌상으론 고려 의종(재위 1146∼1170) 때 정수개가 처음. 뱃길 도중 죽는 사람도 흔했다. 유배자는 조선시대까지 14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유배자 중엔 임금의 옷을 훔치거나, 스캔들을 일으킨 궁녀 상궁 내시도 눈에 띈다. 1762년 사도세자 두둔상소를 냈다는 이유로 흑산도에 위리안치 됐다가 죽은 박치륭(1692∼1766)이나 정약전(1758∼1816) 최익현(1833∼1906) 같은 경우는 정치적 유배에 해당된다.

1876년 최익현은 병자수호조약 불가 도끼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그해 흑산도에 유배 와서 3년 가까이 살았다. 그는 처음 포구가 있는 진리에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나중엔 마을 주민들의 뜨거운 러브콜로 여티미(천촌·淺村)에 자리 잡았다. 마을 입구의 평평한 손바닥바위엔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 ‘(고조선의)기자씨가 세운 강산, 홍무(중국 명나라 태조 연호)의 나라’, 즉 우리나라의 무궁함을 뜻하지만, 그 이면에는 뿌리 깊은 사대정신이 흐르고 있다.

흑산도는 변방이지만 주민들은 일찍부터 깨어 있었다. 모두가 시대를 앞서간 유배 선비들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1791년 정조 임금 행차 때 꽹과리를 울려 ‘과중한 세금 때문에 못살겠다’고 호소한 흑산 대둔도 주민 김이수(1743∼1805)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이수는 2년 동안 ‘흑산진→나주목→전주 전라감영’에 차례로 억울함을 말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산에 닥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한 집에 마흔 근씩 찐 닥나무 내라는 것이나, 어쩌다 낚싯대로 건져 올리는 고등어에 세금까지 내라하니 어찌 살겠느냐’는 것이다. 김이수는 그 험한 뱃길을 건넌 뒤, 천리 만길 한양까지 걸어 올라가 그 억울함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해 문제를 해결했다.
▼ 유배 문화 꽃 피우고 스러져간 정약전 ▼

정약전의 ‘사둔서당 현판글씨’(정약용 글씨·아래)와 서당 바로 앞의 천주교 공소. 1950년대 지은 공소는 해안몽돌을 주워다가 기둥없이 쌓아 올렸다.
정약전의 ‘사둔서당 현판글씨’(정약용 글씨·아래)와 서당 바로 앞의 천주교 공소. 1950년대 지은 공소는 해안몽돌을 주워다가 기둥없이 쌓아 올렸다.
‘유배 16년 동안 파도에 에워싸여/날마다 미친 바다에는/배 한 척 뜨지 않는데/무엇을 쓰고 무엇을 노래하겠는가/…눈 감을 때가 와서/그저 눈 스스로 감으니/그의 죽음 슬퍼하는 자/오로지 파도소리/파도소리/파도소리’

-고은 ‘만인보 정약전’에서
정약전(1758∼1816)은 성격이 활달해 거리낌이 없었다.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동생 정약용(1762∼1837)은 꼬장꼬장하고 깐깐했다. 무엇이든 꼼꼼히 따져 옳고 그름을 밝혔다.

1801년 형제는 나란히 남도귀양길에 올랐다. 음력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율정점(栗亭店) 삼거리주막에서 묵었다. 다산이 서른아홉, 약전이 마흔셋. 약전은 그날 밤 심정을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간 꽃잎 같다오’라고 토로했다.

다음 날 형제는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날 이후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었다. 약용은 나주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내에 도착했다. 약전은 무안 다경진을 거쳐 우이도(목포 서남쪽 51.3km)에 자리를 잡았다. 본섬 흑산도(목포 서남쪽 92.7km)는 그곳에서 40여 km나 더 가야 있었다. 약전과 인간적으로 정이 든 압송 장교들이 눈물바람을 하며 떠나갔다. 우이도는 오늘날 도초면이지만 당시엔 흑산에 속했다. 도초도와 약 4km 거리.

약전은 술을 많이 마셨다. 사귐에 양반 상민 천민이 따로 없었다. 어부는 물론이고 천한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나눴다. 양반이라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글 쓸 게 있으면 주저 않고 대신 써줬다. 섬사람들에게 단연 최고 인기스타였다. 너도나도 서로 자기 집에 모시려고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다.

1801년 약전은 우이도에서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을 알게 됐다. 스물넷 청년 문순득은 약전에게 깍듯했다. 그는 경제적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외로운 약전의 말벗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약전이 유배 온 지 한 달여 만에(1802년 1월 18일) 폭풍을 만나 바다에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6명)이 고기밥이 됐다고 생각했다.

1805년 1월 홀연 문순득이 3년여 만에 나타났다.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난징→베이징→의주’를 거쳐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문순득은 세상 밖의 온갖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가득 싣고 왔다. 틈날 때마다 약전에게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약전은 부러웠다. 그도 훨훨 섬 밖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는 순득에게 ‘하늘아래 첫 세계여행자’라는 뜻의 ‘천초(天初)’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표해시말(漂海始末)’로 엮었다.

1807년 약전은 거처를 흑산도 모래미(사리·沙里) 마을로 옮겼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명(현 4600여 명)이 채 안 됐다. 모래미는 읍동(현 진리) 다음 큰 곳으로, 고기가 잘 잡혀 부자동네였다. 약전은 마을 위쪽 모래언덕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모래언덕서당(사둔서당)인 복성재(復性齋)가 그것이다. ‘복성(復性)’은 ‘사람 됨됨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

약전은 흑산도에서 장창대(1792∼?)라는 소년을 만났다. 그는 읍동 앞바다의 대둔도라는 외딴 섬에서 살고 있었는데, 두문불출하고 책만 읽었다. 생각이 깊고, 보고 들은 것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새 초목 물고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약전은 그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쓰기 시작했다.

1813년 정약전은 ‘동생이 곧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약전은 몸이 달았다. 육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나가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모래미 사람들이 한사코 막았다. 그만큼 약전은 그들에게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이미 약전은 섬 처자와의 사이에 두 아들(학소, 학매)을 두고 있는 처지였다. 아우 다산이 강진 여인과 딸 하나를 둔 것과 비슷했다.

1814년 약전은 가족을 데리고, 한밤중 우이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결국 1년 가까이 설득한 끝에, 1815년에야 우이도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동생을 보지 못하고 1816년 6월 6일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약용은 형이 죽은 2년 뒤인 1818년 9월 귀양에서 풀려났다.

신안=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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