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장사익이 태평소에 다걸기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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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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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의 집에는 이름 모를 많은 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왜 풀을 뽑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꽃이 지면 풀을 베겠다고 했다. “쟤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겨울을 지났겠어요. 미안하더라고.” 제대로 꽃을 피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희로애락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 노래라고 믿는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장사익의 집에는 이름 모를 많은 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왜 풀을 뽑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꽃이 지면 풀을 베겠다고 했다. “쟤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겨울을 지났겠어요. 미안하더라고.” 제대로 꽃을 피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희로애락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게 노래라고 믿는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992년 12월 30일 밤. 마흔셋 장사익(63·가수)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 두 아들의 아버지인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일한 지 만 3년. 차 고치러 온 손님 차 주차해 놓고 차(茶) 내주고 말상대 해주고 청소하고. 그동안 건성으로 살았다는 자책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닌데.’ 달리 할 수 있는 게 뭔지 손으로 꼽아 봤다. 장사를 할까. 아는 사람들이 오라고 하는 데를 갈까. 뭘 한들 지금보다는 낫겠지. 마지막 남은 것이 태평소를 부는 일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3년만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은 먹지 않겠나. 매제에게 그만 나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다. 1993년 1월 3일이었다.

○ ‘이건 안 되겠다.’

1970년 군에 들어가서 31사단 산하에 문화선전대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전남 19개 시군을 돌며 주민들에게 쇼를 보여주는 부대였다. 귀가 솔깃했다. 노래라면 기죽을 일 없다고 생각했다. 입대 직전까지 직장을 다니며 3년간 전문 작곡가에게 배운 솜씨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배운 웅변으로 다진 목청이었다. 트로트라면 자신 있었다.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이듬해 3월 그 부대에 배속됐다. 그런데 큰일이었다.

“부대 고참이 나훈아 노래를 나훈아보다 더 잘하는 거예요. 솔직히 내 실력과는 하늘과 땅 차이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이건 안 되겠다, 그때 생각을 고쳐먹었지요.”

바꾸자. 트로트 대신 다른 스타일로 부르자. 시대를 약간 앞서가던 노래나 팝송, 칸초네, 샹송의 번안곡으로 레퍼토리를 바꿨다. 박인수의 ‘봄비’, 조영남의 ‘물레방아 인생’, 이용복의 ‘마음은 집시’ 같은 곡들. 부대 내 야외공연장 곁 칸막이 쳐진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똑같이 따라 불렀다. 6개월 동안 이를 악물었다. 결과는 대히트. 가는 동네마다 주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지막 순서에 그가 나오면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31사단 봄비 아저씨’를 수신인으로 한 여학생들의 위문편지가 쏟아졌다.

하지만 1972년 제대하고 나서의 삶은 헷갈리기만 했다. 충남 홍성 광천읍에서 태어난 7남매 중 맏아들. 누이들은 서울에 와 공장에 다녔다. 농가에서 키운 돼지를 떼다 장에 내다팔던 고향의 아버지에게는 돈도 논도 밭도 없었다. 고민했던 가수의 꿈은 접었다. 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입대 전 직장은 다른 회사에 넘어가네 마네 하고 있었다. 복직이 불가능했다. 나일론 안감을 만들어 수출하는 업체에 들어가 무역 업무를 봤지만 딱 1년 만에 1차 석유파동이 났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그는 회사의 고졸사원 정리해고 대상이 됐다. 이후 1989년까지 그의 이력서에는 10개가 넘는 직장이 적혔다. 동생의 돈을 빌려 독서실도 운영했지만 수요를 잘못 예측해 확장했다가 문을 닫았다.

“저는 무녀리(동물이 한 태에 낳은 새끼 가운데 맨 먼저 나온 새끼. 좀 모자라고 금방 죽는 경우가 많다) 같았어요. 시골집에서 쌀이랑 김치를 부쳐줘서 겨우 먹었죠. 동생한테 돈을 꿔 달라고 하기도 하고. 무능력했어요.”

부서지고 넘어지면서도 음악은 놓아지지 않았다. 집에서 기타를 치며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때 그의 마음속에 태평소 소리가 아련했다. 어렸을 적 황혼 무렵이면 시골집 앞 둑에 앉은 관섭이 아저씨가 어김없이 불던 태평소.
▼ 첫 공연 이후 지금껏, 노래하면 그냥 즐거울 뿐 ▼

오직 그만이 옆에 앉아 듣곤 했던 그 소리가 스멀스멀 피어나 객지생활에 고달픈 청년의 가슴을 적셨다. 저걸 언제 한번 배워 볼까나….

○ 비우니 보이는 길

“야, 너 노래한다며, 한번 해봐.” “산∼토끼, 토끼야∼” “박자 맞추지 말고 해봐.” “산∼∼토∼끼∼” “너, 속으로 박자 세고 있잖아. 박자를 부숴 봐.” 박자를 늘려서 불렀는데 그것마저 벗어버리라는 것이었다. 장사익은 뒤풀이의 제왕이었다. 나이 마흔넷에 태평소를 불며 함께하던 사물놀이패나 농악대는 공연이 끝나면 으레 술판을 벌이고 놀았다. 그 판을 마감하는 건 언제나 그의 노래였다. 그러다 알게 된 김대환 선생(1933∼2004·타악기 명인)이 그에게 던진 조언이었다. 어느덧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가슴에 태평소 소리를 묻고 살던 그는 1981년 서른둘에 ‘한소리회’라는 아마추어 국악동호회에 들어갔다. 단소를 1년 배우고, 대금을 4년째 배우던 그에게 86년 어느 날 스승 원장현 선생이 태평소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에서 열불이 나더라고요. 얼마나 좋았는지.”

그게 아마 길이었는가 보다. 1992년을 하루 남겨 놓은 그날 밤, 그를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 길이었나 보다. 뭐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매달렸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음악은 탯줄과도 같았다. 놓치면 자신의 삶이 더 지탱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일에서 겪는 좌절을 음악에 매달리며 풀어냈다. 닿을 수 없는 현실과 꿈의 거리. 그는 카센터를 그만 두면서 현실을 버렸다. 그랬더니 길이 하나가 되어버렸다.

태평소에 3년만 목숨을 걸자고 마음먹은 날부터 정말 열심히 태평소를 불었다. 살고 있던 잠실 5단지에서 한강 둔치로 통하는 토끼굴 같은 통로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불어댔다. 겨울바람이 열 손가락 끝을 예리하게 베고 지나갔다.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을까 집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었다. 국악을 하는 후배에게 돈은 안 받아도 되니 끼워만 달라고 해서 공연도 했다. 여기저기 소문이 나고 지역 농악대에 끼어 큰 상을 받을 때 말석에 앉기도 했다.

3년 계획으로 태평소만 붙잡겠다고 하던 그가 2년 만에 노래로 세상과 만나게 될 줄 그도 몰랐다. 뒤풀이 무대를 주름잡던 그가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떠밀리듯 공연을 한 것이 1994년 11월. 이후 7장의 앨범을 내면서 장사익은 서민의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가수로 우뚝 섰다. “마음을 비운다는 게 있잖아요. 욕심 내지 않고 태평소를 선택한 것이 나를, 숨어 있던 길로 인도한 게 아닐까 해요. 그때 가수 된다고 했으면 어디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는 했겠지요.”

○ 초심은 ‘즐겁게’

장사익은 올해 3월 친구 사무실에서 자신이 노래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두 번 울었다. 송창식 인순이와 함께한 무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자신을 보면서 ‘허∼ 저놈의 새끼가 저렇게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네’ 하고 줄줄 눈물이 흘렀다. “내가 나를 보는데, 알지요. 야, 행복하게 부르더라고. 그걸 보는 내가 행복해서 눈물이 나고.”

마지막 곡으로 ‘꽃구경’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보면서는 그동안 만난 모든 인연들이 고마워서 울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게 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던 모든 사람들. 엄마, 아버지,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 음악 친구들,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심지어 자신을 때리고 못되게 했던 사람들까지. 맞아서 넘어졌지만 힘을 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니 고맙단다. 이들이 모두 자신에게 에너지를 줬다는 것이다. “이들이 박수 주고, 정도 주고, 힘을 주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거요. 사람 사는 맛이 이거구나, 그래서 두 번 울었어요.”

첫 노래 무대에서 공연을 끝내고 나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즐겁게 노래를 했다. 그게 장사익의 초심(初心)이고 지금도 변함없는 항상심(恒常心)이다. “아유, 뭐 없어요. 그냥 즐거운 거예요.” 만날 웃어서 생겼다는 눈가의 주름을 또 한번 깊게 지으며 그가 웃었다.
■ 장사익은…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1949년 태어난 장사익은 마흔 다섯에 가수로 데뷔했다. 국악과 가요를 절묘하게 접목해 완성시킨 자신만의 목소리로 사람들의 애간장을 끊어내는 노래를 부른다. 음악평론가들은 ‘장사익류’라고 말한다. 왕년에 불렀던 유행가 ‘봄비’, ‘님은 먼 곳에’ 같은 곡과 자신이 만든 ‘찔레꽃’ 등이 널리 알려졌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 향기는/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의 이 가사는 어렵고 힘들었을 때의 자신을 찔레꽃에 비유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장사익#태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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