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IT 입은 버버리, 패션쇼 신천지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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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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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버버리 월드 라이브’ 현장&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디지털패션쇼 ‘버버리 월드 라이브’. 행사장 내부를 빙 둘러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비와 바람 등 영국 날씨를 상징하는 모티브와 버버리를 대표하는 아이템인 트렌치코트 등이 다채롭게 등장했다. 버버리 제공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디지털패션쇼 ‘버버리 월드 라이브’. 행사장 내부를 빙 둘러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비와 바람 등 영국 날씨를 상징하는 모티브와 버버리를 대표하는 아이템인 트렌치코트 등이 다채롭게 등장했다. 버버리 제공
2001년, 영국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41)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브랜드 버버리의 디자인 수장이 됐다. 그리고 ‘애송이가 뭘 알겠나’라며 폄하했던 일부 비평가들의 비판이 무색하게 지난 10여년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약간은 고루하고 늙게 느껴지기 시작하던 이 브랜드를 그는 정보기술(IT)과 젊은 감성이 결합된 매력적인 브랜드로 혁신시켰다.

총매출액은 2002년 5억9360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1조1872억 원)에서 2010년(2010년 3월∼2011년 3월) 15억100만 파운드(약 2조7500억 원)로 뛰었다. 2010년 실적은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볼 때 매출은 27%, 영업이익은 39% 증가한 수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버버리의 매출과 주가는 비약적으로 높아졌다고 현지 언론은 극찬했다.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혁신을 진행한 주인공 베일리에게는 그래서 ‘버버리의 골든 보이(golden boy)’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제는 승진을 통해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Chief creative officer)’라는 공식 직함을 갖게 된 그를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만났다. 베일리는 3월 ‘타이베이101’의 쇼핑센터 내에 문을 연 아시아 최대 규모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기념해 열린 파티와 ‘버버리 월드 라이브’ 행사 참석차 대만을 찾았다.

9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제가 던진 마지막 질문이 ‘10년 후 내 모습은?’이었어요. 당시 답변은 ‘누가 알겠나. 그렇지만 분명히 디자인 분야에 있을 것 같다. 패션 디자인이 아닐 수도 있고…. 난 도전을 좋아하니까’였고요.

“신기하네요. 정말 정확하게 예측이 맞아떨어져서요. 전 여전히 버버리에서 디자인을 담당하지만 패션뿐 아니라 건축 웹디자인 패키징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죠. 버버리가 소셜미디어 및 IT와 연계된 활동들을 많이 하다 보니 음악이나 그래픽디자인까지 맡고 있고요.”

대만의 ‘타이베이101’ 쇼핑센터에서 올 3월 문을 연 ‘버버리’ 스토어. 버버리 제공
대만의 ‘타이베이101’ 쇼핑센터에서 올 3월 문을 연 ‘버버리’ 스토어. 버버리 제공
버버리는 글로벌 럭셔리 기업들 가운데 가장 IT 친화적인 브랜드로 꼽힌다. 페이스북 팬, 유튜브 뷰어, 트위터 팔로어 수는 명품 업계 최고 수준이다. 2010년 봄여름 시즌 여성 컬렉션은 패션 브랜드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생중계로 공개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웹사이트에 올리고 전 세계인들과 네트워킹도 할 수 있는 ‘아트 오브 더 트렌치’ 사이트(art of the trench.com)는 2009년 11월 론칭 이후 200여 개국에서 1억32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버버리는 미국 뉴욕대의 연구소 ‘럭셔리랩’이 지난해 49개의 글로벌 패션 기업의 디지털 마케팅 활동 내용을 조사한 ‘디지털 IQ’ 순위 발표 결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케이트 스페이드’ ‘코치’ ‘구치’가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버버리 행사 때마다 비가? 비바람이 만든 브랜드니까!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만난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버버리 제공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만난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버버리 제공
버버리는 가장 IT 친화적인 패션 브랜드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이미지를 ‘대중화’하는 것이 명품의 본질인 희소성을 해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지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아요. 기술은 그저 ‘플랫폼’이자 ‘채널’이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일 뿐이에요. 이미 ‘피지컬(실체)’과 디지털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그런 흐름을 외면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마치 ‘명품을 사는 사람은 TV를 사지 않는다. 너무 대중적이니까…’라고 말하는 오류와 같은 것이죠. 럭셔리의 본질은 제품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제품을 둘러싼 여러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과정에서 브랜드와 감정적인 교류를 맺는 게 현대적 개념의 럭셔리가 아닐까 싶어요. 기술은 그런 경험을 좀 더 생생하게 살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죠.”

버버리는 이날 저녁 ‘타이베이101’ 맞은편에 위치한 신인(信義) 프라자에서 아시아 지역의 주요 패션매체 기자들과 연예인들을 초청한 가운데 디지털 패션쇼를 열었다.

오늘 저녁 디지털쇼의 테마가 ‘날씨’인 이유가 있나요.

“디지털쇼를 통해 버버리가 만드는 패션뿐 아니라 음악, 영상 등을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영국 날씨를 경험할 수 있게 했죠. 버버리의 창립자인 토머스 버버리는 비와 바람 등 변화무쌍한 영국 날씨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트렌치코트를 만들면서 브랜드를 출범시켰어요. 날씨를 테마로 한 디지털쇼를 통해 이런 과거의 역사와 현대적 기술을 접목하고 싶었어요.”

IT에 익숙한 한국 소비자들도 이런 버버리의 실험에 관심이 많아요.

“정말 감사할 일이예요.한국인들이야말로 이런 현대적인 기술을 창조한 사람들 아닌가요. 대형 스크린에서부터 반도체까지….”

어젯밤부터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면서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버버리 쇼의 테마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일부 초청자가 ‘버버리가 인공 강우를 뿌린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던데요.

“하하. 정말 신기한 게 우리가 어딜 가든 비가 와요. CEO인 앤절라 애런츠 사장과 오늘 아침 밥을 함께 먹으면서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최근 열린 행사 중에서도 뉴욕 맨해튼 매디슨애버뉴에서 열린 파티나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이벤트 때 어김없이 비가 왔거든요.(농담이라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사실 저희가 비 좀 내려달라고 위에다 메시지를 보냈어요.”

다른 명품업체 고위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대체로 경비가 삼엄해 마음이 위축되곤 해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민주적’인 것 같아요. 어제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열린 파티 때도 스스럼없이 먼저 와서 인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렇게 열린 세상에서 그렇게 막힌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기술 얘기를 해볼게요.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은 소통과 개방성에 있다고 생각해요. 소셜미디어니 각종 IT니 하는 것들이 소통을 극대화하고 있으니까요. IT를 활용하는 기업에서 이런 소통을 막는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내가 막힌 태도를 보인다면 그게 숍 매니저나 매장 직원들, 이어서 고객들에게도 전해지지 않을까요. 브랜드가 IT를 활용해 소통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실제 삶과 IT 공간에서 모두 진정성을 갖춰야 돼요. 온라인에선 친화적인 척, 다정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올 봄·여름 시즌의 버버리 모델로 낙점된 영국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최근 버버리가 선보이는 남성 정장 맞춤 서비스 ‘맨스테일러링’ 모델로 제격인것 같아요. 영국신사의 전형 같아서요.

“에디는 정말 따뜻하고 친절한 친구예요. 정말 영국적으로 생기기도 했고요. 맨스테일러링은 테일러 슈트의 전통과 현대 남성의 감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버버리가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서비스예요.”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온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한정된 시간을 쪼개 쓰느라 인터뷰는 매체당 20분 이내로 제한됐다. 19분을 막 넘기려는 찰나 문 밖에서 대기하던 홍보담당자가 빠끔히 문을 열고 서둘러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베일리는 “(인터뷰가 길어지는 것은) 내 잘못”이라고 기자 대신 둘러대며 ‘더 물어도 된다’는 듯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번 쇼에는 ‘소녀시대’의 제시카가 초대됐어요. 팬들이 호텔이며 행사장까지 진을 치고 있던데요.

“오, 소녀시대. 정말 놀라운 친구들이에요. 저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정말 좋아요.”

인터뷰 종용을 독촉하는 메시지가 다시 한 번 전해졌다. 황급히 마지막 질문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질문은 10년 전과 같은 것으로 골랐다.

10년 후엔 뭘 하고 있을 것 같나요.

“10년 전보다 예측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서. 그래도 분명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겠죠? 저는 호기심이 많고 빨리 싫증을 내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더욱 저를 흥분시킬 수 있는, 또 제가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사랑, 멜랑콜리, 미소…. 이런 화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9년만에 다시 만난 훈남 자신감도 수다도 UP▼

기자는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2003년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처음 만났다. ‘버버리 프로섬’의 남성복 패션쇼가 열린 직후였다. 기자는 당시 ‘금발’ ‘바싹 마른 몸매’ ‘예의 바르고 친절’ 등의 단어로 그를 묘사했다.

그리고 약 9년이 흐른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다시 만난 그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똑같이 친절하고 따뜻하고 핸섬한 남자. 약간 수줍고 내성적으로 느껴졌던 그때보다 좀 더 자신감 있게 느껴지는 게 그나마 유의미한 변화였다.

그는 “10년 전쯤 밀라노의 작은 쇼룸에서 만났던 게 기억난다”고 반갑게 인사하며 하나씩 기억의 파편을 꺼내 보였다. 그와의 인터뷰가 그 때나 지금이나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점도 변화가 없었다. 대개 명품 디자이너와의 인터뷰들은 수십 명의 보디가드와 까칠한 눈매의 본사 홍보최고책임자가 동석한 가운데 열리기 마련이다. 베일리는 밀라노에서나 타이베이에서나 호젓한 공간에서 일대일로 기자를 만났다.

그는 이런 ‘감격스러운’ 대접도 모자라 맞은편에 소파가 있는데도 굳이 기자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풀어냈다. 버버리의 홍보담당자는 “통역이 개입하는 것도 싫어해 웬만하면 기자와 직접 대화를 나눈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하루 앞둔 25일, ‘타이베이 101’ 쇼핑센터 내 버버리 매장에서 열린 칵테일 행사에서도 그는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한 명씩 사진도 찍어주며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베일리는 영국 런던의 유명 디자인스쿨인 ‘로열컬리지오브 아트’ 재학 중 미국 디자이너 도나 캐런에게 발탁돼 뉴욕에서 일했다. 곧이어 밀라노에서 ‘구치’의 기성복 라인 디자이너로도 경력을 쌓은 바 있다. 이후 2001년부터 현재까지 1856년 설립된 영국의 ‘대표 명품’ 버버리의 ‘뉴 밀레니엄’을 이끌고 있다.

타이베이=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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