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속에서 숙성시킨 단색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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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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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단색화’전
5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6월 8일부터 전북도립미술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의 단색화’전은 국내 최대 규모로 1970년
대 이후 40여 년 동안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이룩한 성과를 집중 조명한 전시다.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와 달리 한국의 단색화는 ‘몸’과 ‘촉각성’을 중시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표현한 것이 특징. 전시에선 윤형근의 대작(왼쪽)을 비롯해 김기린 이동엽 최병소씨 등 31명의 작품 150여 점을 볼 수 있다.과천=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의 단색화’전은 국내 최대 규모로 1970년 대 이후 40여 년 동안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이룩한 성과를 집중 조명한 전시다.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와 달리 한국의 단색화는 ‘몸’과 ‘촉각성’을 중시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표현한 것이 특징. 전시에선 윤형근의 대작(왼쪽)을 비롯해 김기린 이동엽 최병소씨 등 31명의 작품 150여 점을 볼 수 있다.과천=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한옥 공간을 기능적으로 차용한 아늑한 전시장. 때론 열린 마당에, 때론 좁고 긴 통로를 따라 자리한 단색 추상회화가 고요한 빛과 풍성한 울림을 길어 올린다.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의 단색화(Dansaekwha: 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은 일체의 구상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단색 추상화만으로 이뤄진 밀도 높은 전시다.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등 1970년대 초 단색화의 태동기를 이끈 화가들,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참신한 감각으로 그 맥락을 확장한 40, 50대 작가까지 31명의 150여 점을 통해 단색화의 형성과정 40여 년을 재조명한 자리다.

소장품에 새 시각을 부여하기 위해 외부 기획자 윤진섭 호남대 교수를 초빙해 마련한 전시에선 자주 접하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소장품을 대거 선보였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모노크롬’ ‘모노톤’ ‘단색평면회화’ 등으로 불렸던 흐름을 ‘단색화’란 고유명으로 공식 표기해 주체적 시각을 드러낸 점이 주목된다. 윤 교수는 “한국 단색화는 그 내용에 있어 서구 미니멀아트와 다르다”며 “이 전시를 통해 ‘단색화’란 우리말 표현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한국미술의 브랜드로 정착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5월 13일까지 계속된 뒤 6월 8일∼7월 15일 전북도립미술관으로 옮겨 순회 전시된다. 02-2188-6000

○ 침묵의 깊이

서구의 모노크롬이나 미니멀 회화가 수학과 언어에 기반을 둔 논리적 작업이라면 한국의 단색화는 몸을 도구로 삼았다. 평생 수행하듯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정신적 초월적 상태를 캔버스에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 미니멀리즘의 ‘텅 빈 회화’와 달리 한국의 단색화에선 치열한 사유와 노동의 흔적, 침묵의 깊이가 우러나온다. 단색의 작품이지만 수십, 수백 번씩 작가의 손이 거쳐 가면서 만들어낸 색의 결이 오롯이 배어 있다. 윤 교수는 “한국의 단색화는 촉각성에 의미를 두면서 자연과 동화되는 한국의 독특한 자연관을 반영한다”며 “서구 작가처럼 형식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생태학적 우주적 대지적 관점으로 완성된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의 첫 머리는 캔버스에 숱한 점을 찍었던 김환기, 서예에 기반을 둔 작업의 이우환, 얇은 종이에 색점을 채운 곽인식의 작품에서 시작된다, 이어 닥을 소재로 풍부한 물성의 세계를 표현한 정창섭, 천연 마포의 색을 살린 뒤 물감의 번짐을 이용해 숭고미를 보여준 윤형근, 체화된 수행처럼 작품을 완성한 박서보, 신문지가 거의 찢어질 때까지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색칠해 물질의 특성을 변화시킨 최병소, 평생 흰색 그림만을 그려온 이동엽 등. 전기 작가들은 한국 단색화가 단지 색의 차원을 넘어, 사대부로부터 이어진 선비 정신과 자연관 등 고유의 철학을 포괄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 발효의 미학

1970년대 초반 ‘앙데팡당’전과 ‘대구현대미술제’ 등을 통해 확산된 한국의 단색화가 화단을 지배하면서 미술 획일화의 부작용을 낳았고 1980년대엔 현실에 대한 침묵을 이유로 민중미술 측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구 미니멀리즘이 1970년대 종언을 고한 것과 달리 한국단색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맹목적 추종이 아닌, 여백과 관조, 무위자연 등 고유한 정신을 두루 아우르고 내면화한 점에서 독자적 예술세계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태생 전기 작가들과 달리 후기 작가들은 산업화 시대를 거친 전후 세대로서 작가 의식과 취향, 재료 등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우레탄 자동차 도료(문범), 반짝이(노상균), 인조진주(고산금), 합성수지(천광엽) 등 인공재료가 등장해 산업사회의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

전, 후기에 걸쳐 한국 단색화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바탕으로 검정 파랑 흰색 등 단순한 색 안에 다층적 의미와 표정을 담아냈다. 작가들이 자신만의 표현방법을 찾고 자신을 담금질하며 완성한 마음의 풍경들. 그 속에 오랜 시간 숙성과정을 거쳐 우려낸 느림과 발효의 미학이 진하게 녹아 있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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