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들이 사는법]O₂ 이벤트 ‘크리스마스의 고백’ 대상 홍승연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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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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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쓰러진 뒤에야, 산소같은 그 고마움 깨달았어요

지난해 말 12차례의 항암치료를 모두 마치고 회복 중인 성윤영 씨(가운데). 그가 4일 저녁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딸 홍승연 씨(오른쪽) 집에서 남편과 함께 “평범함을 되찾고 싶다”는 새해 소망을 말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난해 말 12차례의 항암치료를 모두 마치고 회복 중인 성윤영 씨(가운데). 그가 4일 저녁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딸 홍승연 씨(오른쪽) 집에서 남편과 함께 “평범함을 되찾고 싶다”는 새해 소망을 말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엄마께 드리는 선물이었어요. 이제껏 사랑한다는 표현 한번 제대로 못했거든요.”

“엄마가 내 딸 마음을 왜 몰라. 다 알지. 네 맘 다 알아.”

홍승연 씨(37)는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가 안쓰럽기만 합니다. 다소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내조하느라, 그리고 철없는 자신과 남동생을 키우느라 어머니 자신은 늘 뒷전이었으니까요. 그런 어머니가 암이라는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더 일찍 치료받을 기회를 놓쳤다며 타박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 성윤영 씨(60)는 딸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 살기도 바쁜데 엄마까지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냐면서 오히려 딸을 위로합니다.

승연 씨의 선물은 다름 아닌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보내온 ‘크리스마스의 고백’이었습니다(2011년 12월 24일자 B4면 참조). 그의 메시지는 남동생 성원 씨(35)가 액자에 넣어 어머니가 요양 중인 경기 양평군 ‘황토장수촌’으로 가져다드렸습니다. 성 씨는 “신문에 난 딸의 편지를 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울었다”며 승연 씨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직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말이죠.

O₂는 4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승연 씨 집에서 그의 가족을 직접 만났습니다. 지난해 12월 23일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은 성 씨가 마침 병원진료를 받으러 서울에 온 날이었죠. 특별할 게 없다고 쑥스러워하던 이 가족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공기 같던 아내의 고마움을 실감했죠”

지난해 5월 24일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유방암 2기. 그러나 성 씨는 “암이라는 얘길 듣고서도 참 담담했던 것 같다”고 그날을 기억합니다. 8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친구가 여전히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을까요. 치료만 잘 받으면 되겠지 싶은 마음에 두려움도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 씨는 3주일 뒤 왼쪽 유방 일부와 림프절 2개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항암치료. 6월 말 첫 항암주사를 맞은 뒤에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우선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나날이 계속됐습니다. 기억력도 떨어져 약을 먹은 지 30분 만에 다시 약봉지를 찾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내의 사투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홍현한 씨(61)에게도 당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스스로도 “결혼 38년 만의 최대 위기였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약의 부작용으로 부쩍 예민해진 성 씨가 “이대로 죽겠다”며 치료를 거부하고 나섰을 때는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승연 씨와 걸어서 5분 거리에 살던 부부는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양평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집을 고치느라 두 달 전부터는 잠시 황토장수촌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내가 병을 얻은 뒤 모든 살림은 남편의 몫이 됐습니다. 주방일이나 청소, 세탁 등 모두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죠.

“제게 아내는 마치 공기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옆에 있지만 그 고마움을 몰랐던…. 공기가 부족하니까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겠더라고요.”

사실 홍 씨는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결혼 전 철도청에 근무할 때 철로에 떨어져 다친 것이라고 합니다.

“한창 아플 땐 제가 힘들다 보니 남편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래도 제가 왜 모르겠어요. 정작 자기 몸도 불편한데 뭔가 해주려고 자꾸 애쓰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한없이 고맙습니다.”

지난해 12월 23일 12번의 항암치료가 모두 끝났습니다. 앞으로도 방사선치료나 생물학적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지만 가장 힘든 고비는 일단 넘긴 셈입니다. 약물 후유증이 조금 약해졌는지 성 씨는 이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건강한 삶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생깁니다.

○ “평범한 일상 빨리 되찾았으면….”

성 씨가 암 선고를 받던 날 승연 씨는 정신이 나간 듯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냐며 애꿎은 어머니만 재촉했죠.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덜컥 “암이란다”는 어머니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간 승연 씨 머리엔 어머니와 함께했던 수많은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린 시절의 승연 성원 남매에게 성 씨는 ‘극성 엄마’였습니다. 첫째인 승연 씨에겐 특히 그랬습니다. 예원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승연 씨는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습니다. 명문 사립대 영문과를 졸업했음에도 승연 씨 마음 한쪽에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미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승연 씨는 2005년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가까이 살아서인지 작건 크건 모든 일을 성 씨와 상의해 결정했습니다. 맞벌이를 하면서 윤여훈(4) 소민(1) 남매를 키워낸 것도 어머니의 도움이 컸습니다. 어머니가 아픈 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도 이젠 고민상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할 정도니까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혼자서도 잘하는 딸”이라고, 어머니는 “나무랄 데 없는 아들같이 듬직한 딸”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게 부모의 내리사랑인가 봅니다.

승연 씨의 새해 소망은 소박하지만 절실합니다. 바로 평범해지는 것이죠. 평범한 일상을 되찾으려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이것저것 욕심이 참 많았어요. 근데 엄마가 아프고 보니까 우리가 늘 가졌던 일상적인 것들을 제일 바라게 되더라고요.”

딸의 말에 부모도 장단을 맞춥니다.

“그저께 아내가 정말 오랜만에 콩나물밥을 해줬는데 너무 맛있더군요.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걸 예전엔 몰랐던 거죠.”

“비록 아픈 몸이지만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겠죠.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주어진 걸 최대한 누리면서 살았으면 해요.”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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