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을 뚫고 나갈 듯, 해탈 경지에 오른 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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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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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서 2월 12일까지 1부 ‘김생에서 추사까지’ 전시

중국의 왕희지와 그 이전의 글씨를 혼융한 추사체를 통해 글씨 역사의 틀을 바꾼 추사의 작품. 예술의전당 제공
중국의 왕희지와 그 이전의 글씨를 혼융한 추사체를 통해 글씨 역사의 틀을 바꾼 추사의 작품. 예술의전당 제공
비석에 새긴 2500자 속에 글씨를 통해 스스로를 담금질했던 한 생애의 정수가 담겨 있다. 평생 작업에서 필요한 글자를 모아 만든 집자(集字) 비문이기에 그의 개성이 더욱 돌올하게 드러난다. 조형적으로 다른 글씨체에도 쇠로 만든 활을 당기는 듯한 힘이 느껴지는 필획, 동글납작한 안정된 결구에서 우러나오는 기품은 한결같다.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김생의 탄생 1300주년을 기념한 ‘필신’전을 기획한 이동국 학예사가 김생의 ‘송하빈객귀월’을 확대한 도판 앞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중국과 같고도 다른, 우리 글씨의 전형을 세운 인물로 김생과 더불어 한국서예의 거장들을 재조명한 전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김생의 탄생 1300주년을 기념한 ‘필신’전을 기획한 이동국 학예사가 김생의 ‘송하빈객귀월’을 확대한 도판 앞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중국과 같고도 다른, 우리 글씨의 전형을 세운 인물로 김생과 더불어 한국서예의 거장들을 재조명한 전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海東書聖(해동서성)’으로 이름을 떨친 김생(金生·711∼791 이후)의 탄생 130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筆神(필신)’전에 선보인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의 탁본이다.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린 비문은 954년 승려 단목이 김생 글씨를 모아 만들었고 원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보물 13점을 포함해 한국서예의 걸작 30점, 관련 유물 등 50여 점을 만나게 된다. 도둑맞은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국보 238호)과 같은 작품을 담은 ‘대동취적첩’ 등 거장의 작품이 망라돼 우리 글씨의 미학을 재조명한 자리다. 김생을 중심에 두고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한석봉, 영조 정조의 어필, 이황 송시열 등 도학자, 서산대사 같은 선승, 강세황 이인상 등 화가에 이르기까지 명필이 등장한다.

중국 서예와 같고도 다른 궤적을 걸어온 한국 글씨 미학의 역사를 짚은 전시란 점에서 뜻이 깊다. 1부 ‘필신-김생에서 추사까지’는 내년 2월 12일까지, 2부 ‘도를 듣다, 聞道-김생과 권창륜 박대성 1300년의 대화’전은 2월 15일∼3월 4일 이어진다. 5000∼7000원. 02-580-1660

○ 한국서예 전형의 탄생

탁본한 시기가 각기 다른 김생 글씨의 비문을 보면 한 가지 차이가 있다. 후기 탁본에선 비석의 깨진 흔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중국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너나없이 김생 글씨를 요청하는 바람에 ‘탁본 노역’이 심했던 탓으로 추정된다.

나라 밖에서도 탐냈던 글씨의 주인공 김생은 한국 서예의 전형을 처음 만든 인물이다. 그는 통일신라 이전 고박한 삼국시대 글씨를 토대로 중국의 왕희지와 엄정한 당나라 글씨(唐法)를 한데 녹여 우리 글씨미학의 법을 세웠다. 그의 필적으로 전해오는 것은 ‘태사자낭공대사비’와 조선시대 만든 탁본 등이 있다.

전시장에선 비문 탁본과 함께, 이 백의 시를 행초서로 쓴 ‘송하빈객귀월’을 만날 수 있다. 한 획을 그어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고 변화무쌍하며, 선에 있어 곡선과 직선의 미묘한 운율을 구사하는 등 자유분방하면서 기운이 넘치는 글씨다. 이동국 학예사는 김생의 글씨에 대해 “석굴암의 미학과 동급 차원의 글씨 미학”이라며 “우리 글씨 역사를 토대로 중국 서예를 녹여낸 혼융미학의 결정체”라고 소개했다.

○ 한국서예 전형의 완성

특별전은 김생에 이어 시대별로 서예 명품을 통해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한 한국 서예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그 맥락에서 추사 김정희의 존재는 단연 빛을 발한다. 왕희지, 그 이전의 중국 글씨까지 각종 서체를 통합해 고졸미의 추사체를 완성한 그는 우리 서예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전시에선 ‘행초팔곡병’ 등 글씨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추사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 밖에 고려 탄연의 귀족적 글씨, 조선의 4대 명필로 거론되는 안평대군의 웅장하고 활달한 글씨와 한석봉의 ‘석봉진적첩’, 퇴계와 서산대사의 필적 등 글씨의 다양성을 접하면서 안목을 높일 기회다. 다른 문화를 수용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다시 이를 넘어 보편적 미의 정신을 구현한 글씨들이 우리 미의식의 뿌리를 일깨워준다.

한자문맹사회도 변화하면서 필신의 존재는 잊혀졌다. 한국 서예사를 압축한 이번 전시는 리움의 조선화원대전과 맞물려 고미술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알찬 전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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