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황병기 “‘정면에서 부딪쳐라’ 가르침에 공부도 가야금도 술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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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외당숙

연주자는 운동선수와 같다. 연주도 육체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루라도 연습을 쉬어서는 프로페셔널이 아니다. 황병기는 그렇게 믿는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2층의 이 연습용 방에서 그는 매일 가야금을 탄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연주자는 운동선수와 같다. 연주도 육체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루라도 연습을 쉬어서는 프로페셔널이 아니다. 황병기는 그렇게 믿는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2층의 이 연습용 방에서 그는 매일 가야금을 탄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안방 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라도 한 학기 만에 우등을 못 시킨 적이 없습니다.” 서울 재동초등학교 3학년이던 황병기(75)는 ‘내가 어느 정도인 줄 모르니 저런 말을 하지’라며 혀를 찼다.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 갓 올라온 외당숙 아저씨는 자신만만해했다.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는 놈도 어쩌다가 있습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그놈이 바로 나다.’ 아저씨는 그를 우등생으로 만들겠다면서 단서(但書)를 하나 달았다. “온 식구는 전혀 간섭하지 마십시오.” 옳다구나 했다. 아저씨만 피하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거다. 그러나 아저씨의 ‘공부 마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졌다. 》
○ 최면에 걸린 듯 공부는 시작되고

철사를 둥그렇게 해놓고는 거미를 잡아 걸쳐 놓는다. 거미 똥구멍에서 나오는 거미줄을 철사에 돌돌 말면 근사한 잠자리채가 만들어졌다. 그걸 들고 매미며 잠자리를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황병기가 그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총명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웬걸, 입학하고 나니 점점 공부가 싫어졌다. 집이 있던 서울 계동궁터(현 종로구 현대 계동 사옥 자리)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 때면 온 세상이 다 제 것만 같았다. 금세 낙제생 문턱으로 내몰렸다.

“왜 (공부가) 싫어졌는지 나도 몰라요. 책 표지도 보기 싫고. 글씨를 쓰고 있으면 쓴 약을 억지로 먹고 있는 것 같았어요.”

손이 귀한 집 3대 독자가 그 모양이니 부모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나라의 광복과 함께 나타난 아저씨가 20대 중후반의 김소열 씨였다.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한 아저씨는 그의 집에 부쳐지내면서 가정교사를 자청했다. 지방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 경험도 있었다. 헌칠한 키에 눈은 부리부리하고 대학 교복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어린 황병기는 그를 피해 다녔다. 다른 식구는 간섭하지 말라고 했으니 아저씨 눈만 피하면 공부는 남의 일이었다. 아저씨는 그런 그를 보고도 빙긋이 웃기만 하며 잡으려 하지도 않고, 공부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남짓 됐을까.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듯한 아저씨 옆에 앉아 마음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최면에 걸린 것처럼 공부가 시작됐다.

아저씨는 교과서를 펼치는 대신 헌책방에서 사온 일본 선화(線畵)집과 우편엽서 크기로 자른 종이다발을 꺼냈다. 정교하게 그려진 느티나무며, 의자 같은 걸 종이에 베껴 그리도록 했다. 한마디로 낙서였다. 아저씨도 옆에서 같이 그렸다. 미술공부였다. 재미가 생겼다. 신이 나서 몇 장 더 그리려고 하면 아저씨는 “오늘은 그만하자”고 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가야금 농현(弄絃)하듯 밀고 당기는 법이 대단했다. 나중에는 몸이 단 그가 먼저 공부를 하자고 재촉할 정도였다.

아저씨는 말했다. “난 네게 공부를 가르쳐 주려고 온 사람이 아니야. 공부가 재미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온 거야.” 아저씨는 그의 손을 잡고 숭례문 다락에 올라가서는 조선왕조 이야기를 해줬다. 역사공부였다. 숭례문 둥근 아치 부분의 돌이 왜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인지를 들려줬다. 물리공부였다. 일요일에는 학교에 가서 교실 풍금 건반을 손가락으로 치게 하면서 동요를 같이 불렀다. 음악공부였다. 그렇게 국어며 산수며 과학도 배웠다.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되니 공부가 좋아졌고, 스스로 공부하게 됐다. 자신감이 생겼다. 한 달 만에 성적이 치솟아 학기를 마칠 무렵엔 더 오를 데가 없었다. 졸업할 때까지 그는 내내 1등이었다.

○ 나침반 바늘이 거꾸로 돌다

“참 멋있더라, 멋있어. 병기야, 너는 이 맛 알려면 한참 커야 할 거다.”

1947년경 어느 날, 국도극장에서 창극(唱劇) ‘춘향전’을 함께 보고 돌아온 아저씨가 말했다. 창극을 보러 가게 된 것도 아저씨의 특별한 공부법이었다. 반 학예회에 사극을 올리게 됐는데 반장인 그가 주인공인 원님 역을 맡게 됐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자 아저씨는 “그럼 너 우리나라 고전을 봐야겠구나”라며 그를 데리고 극장을 찾은 것이었다.

아저씨는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하며 명창(名唱)들이 부르던 대목을 흉내 내보다 잘 안 되자 킥킥 웃으며 저 혼자 흐뭇해하기도 했다. 이동백, 정남희, 임방울, 박녹주 같은 당대 명창들의 공연을 보는 동안 황병기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지루해 죽겠네’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보통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신기하고, 한편 부러웠다.

“나도 아저씨 정도의 수준이 되어서 그 소리들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도대체 뭔가. 그래서 그때부터 국악에 관심이 생겼어요.”

아저씨에게서 배운 건 공부만이 아니었다. 방과 후 공차기를 하다 교실 유리창을 깬 날이었다. 시무룩해져 귀가한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아저씨가 말했다. “내일 아침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등교해라. 선생님들은 와 계실 시간이니까. 교무실에 가서 담임선생님께 보태지도, 빼지도, 뭐 바라지도 말고 일어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라. 거짓말 하나 없이.”

그런다고 혼이 안 날까, 반신반의하면서 이튿날 그대로 했더니 담임선생님은 야단은 고사하고 아주 좋아했다. 담임선생님은 벚나무를 도끼로 찍은 사실을 아버지에게 솔직히 고백한 조지 워싱턴에 그를 비유하며 칭찬했다. 반에서 영웅이 되다시피 했다. “그때 아저씨 말은 ‘문제가 생기면 꾀를 부리거나 피할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정면에서 부딪쳐라’라는 것이었어요. 그럼 다 해결된다는 것이었죠.”

이런 아저씨의 가르침은 1951년 부산 피란시절, 중학교 3학년이던 황병기가 가야금을 배우게 될 때 활짝 꽃피었다. 경기중을 다니던 남자애가 가야금을 배운다고 주위에서 이상하게 볼 때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솔직하게 정면으로 가야금을 대했다.

“난 그 아저씨가 미리 이 길을 닦아놓은 거라고 봐요. 내 평생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 같아. 완전히 지남침(指南針)이 거꾸로 돌아버렸으니까요.”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점령당한 어느 날 학교에 간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아저씨가 계동 근처 교동초등학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학교 앞에 갔더니 인민군복을 입은 아저씨가 일군의 병사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었다. 인민군에 강제 징집을 당한 것이었다. 그게 아저씨를 본 마지막이었다.

○ 가야금과 나

황병기는 “내 삶에서 중요한 일은 전부 가야금을 통해서 이뤄졌다”고 말한다. 배우자(작가 한말숙 씨)는 국립국악원에서 같이 가야금을 배우다 만났다. 1990년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한 첫 한국인도 그였다.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북측의 공식 초청을 받았고 한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분단의 장벽을 가야금 소리로 뚫은 셈이다. 그리고 가야금으로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다. “나와 가야금은 숙명적인 관계에 있는 거지요.”

예술을 하는 이유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가 생각하는 참된 기쁨은 슬픔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슬픔이 복받치는 기쁨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우는 이유와 비슷하다. “음악도 슬픔을 머금고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게 최후의 목적인 것 같아요.” 그의 가야금은 어느 정도를 이뤘느냐고 물었다. “예전에 내가 곡을 타니까 제자 하나가 울더라고.” 스스로 연주하며 운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없지. 그 경지에는 못 도달했지.” 그가 답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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