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신의 물방울, 원조가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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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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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보르도 메도크 와이너리서 ‘자부심’을 만나다

포도 수확은 끝났지만 메도크의 가을엔 아직도 포도 향기가 베어 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내년의 새로운 결실을 약속하며 휴식을 준비한다. 보르도=황준하 기자 juna@donga.com
포도 수확은 끝났지만 메도크의 가을엔 아직도 포도 향기가 베어 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내년의 새로운 결실을 약속하며 휴식을 준비한다. 보르도=황준하 기자 juna@donga.com

메도크의 가을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포도 수확이 모두 끝난 10월 하순, 보르도 시에서 삼각형의 반도 끝자락까지 이어진 110km 길 양편엔 자연의 축복을 받은 메도크의 보석, 포도밭이 가을의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반짝인다. 중간중간 샤토라고 불리는 와이너리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살포시 드러낸다. 그 속에서 인간이 빚은 예술품, 와인이 익어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보르도는 프랑스 와인의 대명사다. 보르도 시에서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지롱드 강은 수백 년 동안 보르도 와인의 명성을 영국으로, 유럽 전역으로 실어 날랐다. 지롱드 강 왼쪽에 위치해서 흔히 ‘좌안(강의 왼쪽)’이라고 불리는 메도크 지역은 보르도 와인의 자부심이며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로망이다. 메도크와인협회 초청으로 1만6500ha에 이르는 메도크의 포도밭과 그곳에서 ‘신의 물방울’을 빚는 사람들을 만났다.

매년 최상의 와인에 도전하다

메도크 지역은 원산지명칭통제(AOC)에 따라 메도크, 오메도크, 생테스테프, 포이야크, 생쥘리앵, 리스트라크메도크, 물리스, 마르고 등 아펠라시옹이라고 불리는 8개 생산지로 구분된다. 또한 크고 작은 규모의 1425개 와인생산자는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5개의 ‘크뤼 패밀리’로 나뉜다. 1855년 제정된 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자부심 강한 그랑크뤼 클라세, 매년 엄격한 심사를 통해 품질을 인증받는 크뤼 부르주아, 농가의 규모는 작지만 전통의 맛과 장인정신을 간직한 크뤼 아르티장, 포도 재배에서 와인 생산, 해외 수출까지 다수의 농가가 힘을 합친 공동조합,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하우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독립 크뤼.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메도크 와인의 전통을 이어가며 매년 더 나은 예술품을 창조해 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사람을 잇는 오묘한 향기… 메도크産은 위대한 예술품▼

메도크의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포도 수확도 예년보다 열흘가량 일찍 끝났다. 생쥘리앵의 독립 크뤼 샤토 테나크의 기술 책임자인 디아나 가르시아곤살레스 씨는 스페인에서 온 미모의 27세 여성이다. 그녀는 “올해는 포도가 자라는 데 좋은 기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자극을 받고 최상의 와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2년 뒤 탄생할 2011 빈티지는 ‘환상의 빈티지’로 평가받는 2009년 못지않은 작품이 될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한다.

기후가 좋은 해의 와인은 재료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어도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해에는 만드는 사람의 기술과 정성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실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최상의 포도만을 신경 써서 골라내고 발효와 숙성 과정, 그리고 블렌딩에 더 섬세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리스의 독립 크뤼인 샤토 모카유의 어원은 ‘나쁜 돌멩이’라는 의미다. 자갈과 모래가 많은 메도크의 척박한 대지에서는 어떤 곡물도 자라기 힘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곳에 사람들은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나쁜 돌멩이는 축복받은 돌멩이로 변했다.

“한국의 농촌에서는 젊은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고요? 메도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론과 신기술, 그리고 도전의식으로 무장한 젊은층이 계속 몰려오고 있고 그들이 전통과 조화를 이루며 메도크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겁니다. 우린 항상 최고의 와인을 만듭니다.”

크뤼아르티장협회 회장인 필리프 트레솔 씨(54)의 말엔 메도크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다.

도전은 젊은층의 몫만은 아니다. 오메도크의 크뤼 아르티장 샤토 투르 벨레르의 주인인 파트리스 벨리 씨(51)는 고등학교 교사다. 학생들에게 포도 경작을 가르치던 그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2006년 와이너리를 인수해 직접 와인 생산에 뛰어들었다. 내년부터는 학교 일을 그만두고 부인과 포도 키우는 일에 전념할 계획이다.

메도크의 250개 포도 농가를 회원으로 둔 공동조합 위니메도크는 요즘 시장을 해외로 넓히기 위해 뛰고 있다. 기술책임자인 로랑 바세 씨는 “최근 2, 3년간 메도크 와인은 한국 시장에서 다소 고전했다. 하지만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FTA는 메도크 와인에도 새로운 기회다”라며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와인이 무르익어 가는 와이너리 숙성고. 1, 2차 발효 과정을 거친 포도는 오크통에서 1년 이상 숙성의 시간을 보낸 후 매혹적인 
루비빛의 메도크 와인으로 탄생한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샤토 테냐크의 기술책임자인 디아나 가르시아 곤살레스 씨가 숙성 중인 
와인을 시음하며 양조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보르도=황준하 기자 juna@donga.com
와인이 무르익어 가는 와이너리 숙성고. 1, 2차 발효 과정을 거친 포도는 오크통에서 1년 이상 숙성의 시간을 보낸 후 매혹적인 루비빛의 메도크 와인으로 탄생한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샤토 테냐크의 기술책임자인 디아나 가르시아 곤살레스 씨가 숙성 중인 와인을 시음하며 양조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보르도=황준하 기자 juna@donga.com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리스트라크메도크의 크뤼 부르주아 샤토 도니상의 주인인 마리베로니크 라포르트 씨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주머니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가 가업을 잇는 걸 원치 않았다. 와인 만드는 일은 너무 힘들다며 절대 이 일을 하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말했다. 그녀도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었고 약사가 되려고 했다.

“졸업 후 어쩌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어요. 남편을 만났고 포도밭에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됐네요. 와인은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돈을 많이 벌지 못해요. 제 아이들이 하는 건 절대 반대예요. 말릴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겼다. 어느새 그녀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그래도 할아버지, 아버지가 애써 이루어 놓은 걸 나의 대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곳 직원들은 일한 지 20년이 넘어요.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일했지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포도나무에 대한 추억, 고향에 대한 애정을 잊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는 와인에 대한 진한 사랑이 묻어 있다.

“와인은 만들자마자 바로 마시는 게 아니에요. 마실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해요. 최고의 빈티지는 앞으로 탄생할 빈티지예요. 매년 새로운 개성이 담긴 와인이 만들어지니까요. 많은 사람이 최상이라고 한대도 무조건 따라가지 마세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게 최고의 와인입니다.”

리스트라크메도크의 샤토 퐁레오를 경영하는 샹프로 씨 부부는 레드와인이 대세인 메도크에서 화이트 와인 생산을 계속해 왔다. 할아버지 때부터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또 전통적인 오크통 제조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메도크의 어떤 것을 가장 사랑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 와인이죠.”

5일 동안 직접 차를 운전하며 안내를 맡았던 여성 양조학자 카트린 블리망 씨는 마지막 날 여정에서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전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중요하지만 옛것을 외면해선 안 된다. 와인은 코카콜라와는 다르다. 영혼을 잃어버리는 건 진화가 아니다.”

친구를 만들어주는 와인이 있는 식탁

메도크의 크뤼 부르주아 샤토 루스토뇌프의 브뤼노 스공 씨(46)는 동양의 방문객들을 위해 자신의 집에 특별한 점심식사를 마련했다. “와인은 향기가 훌륭해야 첫 느낌이 좋고 맛도 좋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음식을 준비한 그의 노모는 식탁의 맨 끝에 앉아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손님들에게 이것저것을 권하며 식사 내내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챙겨주었다. 생테스테프의 샤토 라페르 소유주인 르네 라비예 씨(59) 집의 점심 식탁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자신은 거의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손님들의 접시가 비워지면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메도크의 마을 레스토랑은 테이블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대부분 마을 이웃이라 식사 중에도 누가 들어오면 큰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포옹을 하며 안부를 묻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그리고 식탁엔 으레 와인이 한 병씩 놓여 있다.

샤토 모카유의 소유주인 파스칼 두르트 씨는 메도크에서 와인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만찬을 보세요. 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가 이렇게 와인을 함께 마시면서 와인에 대한 각자의 느낌은 달라도 어느새 웃고 농담하며 다정한 친구가 됐잖아요. 와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보르도=황준하 기자 j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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