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사람이 사람인 것은 ‘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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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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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생각만큼 머리도 썩 좋지 않아.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언제나 갈팡질팡하지. 그래서 서로가 돌봐줘야 해. 인간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면 강해지거든.”

― 만화 ‘꼭두각시 서커스’ 중에서
간만에 이른 퇴근. 와이프께서 ‘음식물쓰레기 처리’ 명을 내렸다. 두 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선 아파트 단지. 해질녘 벤치에 앉은 웬 노인과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손녀인 아이는 무릎 위에서 재롱이 한창. 어르신 눈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 순간 뜬금없이, 아이가 마구 졸라댄다.

“할부지, 노래 불러줘. 노래 불러줘.”

어이쿠, 어르신. 저 당황한 표정이란. 이른 저녁이라 사람도 많은데. 어르고 달래도 손녀는 더 칭얼대고. 얼른 자릴 비켜주려 돌아서는데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입을 뗀다.

“낮에 놀다 두우고 온 나뭇잎 배는….”

음정은 엉망, 떨긴 얼마나 떠시는지. 헌데 그 노래, 왜 그리 듣기 좋을까. 여전히 딱한 얼굴인데 멈추진 않으신다. 장단 맞춰 다릴 까딱거리는 아이는 어찌나 어여쁜지. 가슴 한 구석 따끈해지는데, 아이가 한마디 했다.

“근데, 할부지. 저 아저씨 이상한 냄새 나.”

젠장, 난 이래서 꼬마가 싫어.

‘꼭두각시 서커스’는 설정이 독특하다. 마냥 유쾌할 듯한 제목과 달리, 만화 속 인형은 결코 꼭두각시가 아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인형(혹은 기계)은 독립된 ‘자아’를 갖는다. 그리고 영생불사인 자신들이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지구를 망치는 인간에게 더는 세상을 맡기지 말자. 인형들의 ‘인류 몰아내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인간도 가만히 당하진 않는다. 비밀 인형술사 집단 ‘시로가네’를 조직해 대항한다. 인형을 조종해 인형과 대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 와중에 남을 웃겨야만 사는 이상한 병에 걸린 한 남자와 웃는 법을 잊어버린 한 여자가 가족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을 지키려 혈투를 벌인다….

사실 이 작품, 만화래도 억지스러운 데가 많다. SF도 아니고 중세에 만든 ‘완전체’ 인형이라니. 차라리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자연스럽다. 게다가 초등학생 꼬마가 인류의 재앙을 온몸으로 막아내다니. 뭐, ‘로버트 태권V’의 훈이도 10대이긴 하지만.

허나 그 황당 설정만 받아들인다면, 작품에서 상당한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짜임새가 쫀쫀하다. 43권이나 되는 장편이지만 뻔하게 흘러가질 않는다. 센 놈 처치하면 더 센 놈이 나오는 일본만화 특유의 ‘토너먼트 식’ 전개가 없다. 초반 마구잡이로 튀던 에피소드들이 후반에 다 이유 있는 복선이 되는 디테일도 살아있다. 악당은 물론 작은 단역조차 ‘뒷얘기’를 지닌 입체감 있는 캐릭터인 점도 매력적이다.

뭣보다 이 만화는 독자에게 던진 주제의식을 끈기 있게 밀어붙인다. ‘인간이 인형보다 나은 점은 과연 무엇인가.’ 아니, 낫다는 자만은 뭘 근거로 하나. 지능을 가졌단 이유로 다른 모든 생물체를 맘대로 주무를 권리가 인간에게 있는가. 힘의 논리대로라면 훨씬 강력한 인형이 세상을 지배해선 안 될 이유가 없다. 작가는 가상의 인형이란 대상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 해답을 인간의 ‘관계’에서 찾는다.

인간은 결코 대단치 않다. 더군다나 개인은 매우 나약하다. 하지만 함께 하면 묘하게 플러스 효과를 낸다. 누군가 내 등을 받쳐준다는 믿음. 내가 버텨야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각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서로에 대한 신뢰. 그게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이유라고 만화는 호소한다.

물론 이건 치기어린 발상일 수도 있다. 세상은 그리 단순치 않으니까. 다만 한번쯤 떠올려보자. 무엇이 그 할아버지가 노상에서 노래하는 부끄러움을 잊게 했을까. 무엇이 그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었던가. 사람은 ‘관계’ 속에서 숨을 쉰다. 너무 자주 까먹어서 탈이지만.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고 썼다가 O2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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