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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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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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인간 세상 내려온 것은 좋은 인연이었네
◇ 부부/이종묵 지음 308쪽·1만3800원/문학동네

“오늘밤 촛불 켜지 않았더니, 낭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향긋한 숨소리만 듣다가, 아침에 거울 보고 하는 말, ‘어찌하여 뺨에 바른 연지가 낭군 얼굴에 가득 묻었나요?’”

달콤한 애정소설에나 어울릴 듯한 이 시구는 조선시대 문인 이안중(1752∼1791)이 신혼의 즐거움을 운치 있게 묘사한 ‘달거리 노래’의 한 대목이다. 결혼 후에도 각방을 썼을 정도로 부부유별이 엄격했다던 조선시대지만 신혼부부가 뜨겁게 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눈 것은 오늘날과 다를 리 없다. 이 시의 화자인 아내는 남편을 껴안고 자면서 “옆집에 사는 여편네, 혼자 자면 얼마나 추울까?”라고 농담도 한다.

부부의 정이 각별했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귀양지인 제주도에서 자주 아내와 한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여러 달 걸려 도착한 김치가 시어서 먹을 수 없으니 젓갈을 보내 달라”고 하는 등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엔 반찬투정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귀양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건네 듣고는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월하노인 데리고 명부에 하소연하여, 내세에는 부부간 처지를 바꾸어서, 내가 죽고 그대 천 리 밖에 살아남아, 당신으로 하여금 슬픈 마음 알게 하리라.”(‘완당전집’ 중)

유교 이념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의 윤리관에 따라 내외하고 지내다 부모가 정해준 짝과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한 뒤 평생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옛 문헌과 문학작품을 통해 옛 부부들의 사랑과 삶, 가치관 등을 살펴본 저자는 “옛글 속 부부의 모습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예나 지금이나 부부는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정에 따라 사랑하고 또 헤어진다”고 말한다.

이 책은 ‘옛 부부는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현상’과 ‘옛 사람들은 부부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흥미로운 사실은 금기가 많은 조선시대에도 상당수 청춘남녀가 뜨겁게 자유연애를 했으며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결혼했다는 것. ‘중매’의 탈을 썼어도 같은 마을 남녀가 연을 맺어 실은 어릴 적 소꿉놀이 친구가 배필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열여덟 선남과 열여덟 선녀가, 동방화촉 좋은 인연 맺었네. 생년월일 같고 한마을에 살았으니, 이날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요?”(김삼의당 ‘삼의당유고’ 중)

물론 옛 부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불화를 겪었다. 이덕무(1741∼1793)는 ‘사소절’에서 “남편은 ‘남자가 높고 여자가 낮다’고 믿어 아내를 억누르려고 하고, 아내는 ‘너나 나나 동등한데 무슨 굽힐 일이 있겠느냐’ 하는 데서 부부간 불화가 생긴다”고 했다. 가난이나 남편이 첩을 들이거나 기생집에 드나드는 것, 남편이나 아내가 처가나 시댁에 잘하지 못하는 것도 불화의 주된 이유였다. 유희춘(1513∼1577)의 아내 송덕봉(1521∼1578)은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시어머니 상을 지극 정성으로 치르는 등 시댁에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당신은 친정아버지 제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무덤에 비석도 세워주지 않느냐”며 나무랐다.

갈등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듯 ‘스스로에게서 갈등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화해의 방법 역시 오늘날 부부에게도 조언할 만하다. 조선시대 대표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은 제자에게 “성품이 악해 스스로 소박을 당하게 된 경우를 제외하면 (부부간 모든 갈등은) 남편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유희춘 역시 아내의 편지를 받고는 장인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줬고 이후 부부의 금실은 깊어졌다.

남성중심적 시대이기에 옛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모양처의 덕목 중에는 남편의 잘못된 행실을 따끔하게 충고해 바른 길로 이끄는 적극적인 내조도 포함돼 있었다. 강정일당(1772∼1832)이 남편 윤광연에게 편지를 보내 낮잠을 잔다고 꾸짖고 과음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담배를 피운다고 지적했다는 대목에선 어린 아들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연상돼 웃음이 나온다.

국가가 혼인에 적극 관여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정조는 1791년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친 노총각 노처녀에게 관아에서 혼인 비용으로 쓸 돈 500전과 포목 두 필을 대주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 남녀의 혼인을 국가의 장래와 연결된 대사(大事)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에서 홀아비와 과부의 혼인을 권하는 것을 목민관의 업무에 포함시켰다.

만남부터 죽음으로 인한 이별까지 옛 부부의 생을 거시적이면서도 세밀하게 바라본 이 책에서는 옛 사람들의 남성중심적 시각과 봉건적 관념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옛 선비들의 부부 생활을 보면 사랑을 넘어 서로 공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공경을 기반으로 부모와 자녀, 친지와 이웃 등과 더불어 사는 삶도 실천했다. 옛 부부의 삶에서 배워야 할 점이 여전히 많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옛 신혼부부의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백년해로한 노부부의 은은한 정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이번 추석엔 부부 단둘이 술 한잔 기울이면 어떨까. 18세기 문인 어유봉(1672∼1744)처럼 말이다.

“노랗게 국화가 피어 아름다운 계절 가을날, 당신이 인간 세상 내려온 것 좋은 인연이었네. 기쁜 일 슬픈 일 다 겪고 함께 백발이 되었는데, 술지게미 함께할 날 그 몇 해나 남았겠는가?”(일흔이 넘은 어느 날 아내에게 지어준 시, ‘기원집’ 중)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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