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Wisdom]서울 성벽이 헐린 진짜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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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송우혜 씨 ‘성벽 철거 역사 바로잡기’ 글 보내와

동아일보 6월 4일자 B7면 ‘이장희의 스케치여행’ 기사에 대해 소설가 송우혜 씨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송 작가는 장편소설 ‘마지막 황태자’와 ‘문학작품을 통해 진행되는 이순신 폄훼현상’ 등의 논문을 통해 우리 역사를 깊이 있게 탐구해 왔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 서울의 성벽이 철거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현재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라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다. “지존의 일본 황태자가 문루 아래로 드나들 수 없다는 이유로 남대문 옆 성벽을 헐고 도로를 내 그리로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 결과 사실은 그것과 다르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조작, 유포된 낭설이 아직까지 바로잡히지 않은 것뿐이다.

서울 성벽의 철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연명으로 고종황제에게 아뢰었다.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이 붐비고 거마(車馬)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서 매양 전차와 부딪치는 경우가 많으니, 교통과 운송에 대하여 편리하고 적절한 방법을 별도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의 좌우 성첩을 각각 8칸을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들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 합니다….”(고종실록 1907년 3월 30일, 승정원일기 1907년 음력 2월 17일)

고종이 즉시 허가한다는 재가를 내려 성벽 철거작업이 추진되었다. 내각이 개편된 뒤인 1907년 6월에 총리대신 이완용이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첩과 성벽 일부의 철거”를 통보(각사등록 광무 11년(1907년) 6월 24일)하는 절차를 거쳤고, 같은 해 7월 30일에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양위하고 10세 소년 영친왕 이은이 새 황태자가 된 뒤(1907년 8월 7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황태자가 10월 16일에 방한한다”고 대한제국에 통고한 날은 1907년 10월 3일이었다. 이은을 인질로 끌어가기 위한 여건 조성 작업이었다. 서울 성벽 일부가 실제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왔다 간 때(1907년 10월 16∼20일)로부터 만 5개월이나 지나서였다.

이때의 성벽 철거작업에 대하여 황성신문(1908년 3월 10일)과 대한매일신보(1908년 3월 12일)가 보도한 기사가 남아 있다.

송우혜 소설가 swoohy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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