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강진 백련사 동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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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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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거닐던 그곳… 강렬한 낙화에 숙연함이

붉은 빛의 동백
붉은 빛의 동백
어느 노래 가사처럼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을 본 일이 있는가, 아니 그 ‘후드득 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송창식의 ‘선운사’는 동백꽃에 대한 노래다. 하지만 동백의 그 처연한 낙화(落花)를 제대로 느끼려면 선운사보단 강진 백련사로 가라. 고창 선운사에선 울타리로 동백숲을 에워싸 놓았다. 강진 백련사에선 직접 숲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 동백, 변치 않는 의리의 상징


동백은 중부 이남에서 자란다. 수도권에선 보기가 어렵다. 사계절 내내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늘 푸른 잎이 넓은 나무다. 그래서 과거 선비들 사이에서는 변치 않는 의리의 상징으로 사랑 받기도 했다.

보통 겨울에 꽃이 피지만, 중부지방에 가까운 곳에서는 늦은 봄까지도 꽃을 볼 수 있다. 추운 계절에 꽃을 피우다 보니 암술과 수술의 중매는 곤충이 아닌 새가 맡는다. 이 새가 바로 동박새다. 동박새는 몸집이 작고 귀여우며 깃털이 아름다워 여러 전설에 등장한다.

그러나 동백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낙화다. 붉은빛의 커다란 꽃이 만개해 한창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때, 목이 부러지듯 툭 하고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진다. 이것은 꽃잎이 모두 붙어 있는 통꽃 구조이기 때문이다.

동백의 낙화는 잘 모르는 사람이 처음 보면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일본에서는 무사의 목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해 ‘춘수락(椿首落·椿은 동백을 뜻함)’이라 표현하며 불길하게 여겼다. 반면 꽃이 완전히 시들기 전에 한꺼번에 떨어지기 때문에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나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 툭, 꽃이 떨어지는 소리

해남에서 일을 마친 후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강진으로 향했다. 국도를 달리다 지방도로 들어섰다. 간척으로 만든 논 너머 멀리 강진만(灣)이 보였다. 백련사로 가는 도로로 빠져 만덕산 초입의 경사길을 올라간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1년(839년)에 세워진 고찰이다. 고려 후기인 13세기에는 이곳에서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가 ‘백련결사(白蓮結社)’란 불교 정화운동을 조직했다. 뒤에 이 절에서만 여덟 명의 국사가 나왔고, 백련사는 대몽항쟁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백련사는 고려 말기 귀족적 성향에 물들며 끝내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절집이 불탔다. 지금의 절은 그 후 새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의 혜장선사가 교류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정조 사후 신유사화(辛酉士禍·1801년)에 연루돼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그 후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백련사 동백숲 근처의 다산초당에서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부국강병과 민본주의를 꿈꾸며 실학체계의 기본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백련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따라 걸으면 이내 동백숲길로 접어든다. 아마 정약용도 이 길을 따라 객지생활의 벗이었던 혜장선사를 찾았을 것이다. 봄의 한 중간, 숲 한가운데 앉아 가만히 이름 모를 스님의 부도를 스케치북에 담았다. 어디선가 새의 지저귐이 들려 왔다. 이내 툭, 꽃이 떨어지는 소리. 조용한 숲 속에 나 말고 또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다. 동박새일까? 혹시 나 때문에 꽃 근처에 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투두둑, 여러 송이가 동시에 떨어졌다. 그 옛날 정약용도 근처 어딘가에 앉아 이 소리를 들었을까? 조용한 숲 속의 아침에는 그가 옆에 앉아 시 한수 읊어주는 것조차 이상하지 않을 듯한 묘연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 밑 절벽에 부딪히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있네
둥그런 나물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 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정약용 ‘제보은산방(題寶恩山房)’ 중에서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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