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귀족서 퇴역한 그랜저 “영광은 짧고 추억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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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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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등장, 성공의 상징서 회사원 차 되기까지

회사원 조모 씨(43·서울 강서구 염창동)는 1991년의 그날 아침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서울 관악구의 한 주택가에 살던 그는 아버지의 차를 몰고 외출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웃집의 ‘그랜저’가 골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그는 차량을 옮겨 달라는 뜻으로 경적을 울렸고 잠시 후 이웃 2층집 아주머니가 그랜저 키를 들고 나타났다.

“남편이 오늘 새벽에 퇴근해서 지금 일어나지를 못해요. 죄송한데 직접 차를 좀 옮겨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운전을 못 해서요.”

조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고 회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키를 받아 든 조 씨는 조심스럽게 그랜저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자동변속기를 작동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그랜저를 옆 골목으로 조심조심 옮기면서 일생일대의 목표를 세우게 된다.

‘나도 사회에 나가면 꼭 그랜저를 탈 테다.’

조 씨는 결국 소원을 이뤘다. 3년 전 그랜저를 구입해 지금껏 애지중지 몰고 다니고 있다. 2, 3주에 한 번씩은 왁스와 코팅제를 바르고 주차는 언제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한다. 그랜저를 몰고 회사에 출근했다가도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버스로 퇴근한다.

왜?

“그랜저 비 맞을까 봐.”

○ 그들에게 그랜저란…

올해 1월 5세대가 나온 그랜저는 4, 5월 두 달 연속 1만 대가 넘게 팔리며 전체 승용차 판매량 1위를 달리고 있다. 기존 베스트셀링카였던 준중형 아반떼, 중형 쏘나타의 자리를 빼앗으며 ‘가장 대중적인 차’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조 씨와 같이 그랜저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는 운전자들에게 한편으로 ‘판매량 1위 그랜저’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조 씨는 “인생의 목표 중 하나를 ‘그랜저 오너가 되는 것’으로 정하고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눈 떠 보니 그랜저가 ‘아무나 타는 차’가 돼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 씨는 “그랜저의 지위가 어떻든, 그랜저는 나의 꿈이었고 나는 그 꿈을 이뤘다”며 오늘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비가 오나 안 오나 창밖부터 살핀다.

조 씨와 같은 중년들에게 그랜저가 ‘꿈’이 되기까지 그랜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세대 그랜저가 시판된 것은 1986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공식 올림픽 스폰서였던 현대자동차는 외빈용 고급 승용차를 급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현대차가 보유하고 있던 최고급 승용차는 스텔라와 스텔라에 크롬도금을 떡칠한 1세대 쏘나타가 전부였다.

중·대형 고급차 시장은 대우자동차의 ‘로얄’시리즈가 꽉 잡고 있었지만 현대차는 고급차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일본 미쓰비시와 제휴하고 디자인은 현대가,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은 미쓰비시가 맡아 올림픽을 2년 앞둔 1986년 한국에서는 그랜저, 일본에서는 ‘데보네어’라는 이름으로 현대차 최초의 고급차가 탄생했다.

새 모델이 나오지 않고 부분 변경(페이스 리프트)만 계속해온 대우 로얄시리즈와 임페리얼에 싫증난 상류층 소비자들 사이에서 “그랜저는 조용하고 푹신하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그랜저는 단숨에 로얄시리즈를 압도하고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대형차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각 그랜저’로도 불리는 그랜저는 당시 대형차였다고는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준중형으로 분류되는 아반떼보다도 차체나 실내가 작았다.

길이는 4865mm로 지금의 아반떼(4530mm)보다 길었으나 차폭은 1725mm로 아반떼(1775mm)보다 50mm나 좁았으며 차량의 높이도 1430mm로 아반떼(1435mm)보다 낮았다.

앞뒤 바퀴축 간 거리는 2735mm로 아반떼(2700mm)보다 길었다. 1세대 그랜저는 지금의 아반떼보다 실내 폭이 좁고 천장도 낮지만 앞뒤 거리만 다소 여유가 있는, ‘좁고 긴’ 차였다.

하지만 당시 ‘각 그랜저’는 고위 관료,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뿐 아니라 이른바 ‘조폭’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그랜저를 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 그랜저 뒷좌석에서 운전석으로

1992년 ‘각 그랜저’의 뒤를 이어 나온 ‘뉴그랜저’는 5m에 육박하는 차체 길이(4980mm)와 구형보다 무려 8.5cm 넓어진 차폭(1810mm)으로 단숨에 시장을 장악했다. 대한민국 상류층은 하루아침에 초라해진 좁고 긴 ‘각 그랜저’를 버리고 진정한 대형 세단인 뉴그랜저로 대거 이동했다.

하지만 그랜저와 접촉사고가 날 경우 어떤 사람이 내릴지 몰라 서민들이 덜덜 떨던 시절은 뉴그랜저 단종과 함께 저물기 시작했다.

뉴그랜저의 뒤를 이어 1998년 나온 그랜저XG는 그랜저 대중화의 시작을 알리는 모델이었다. 폭은 뉴그랜저보다 15mm 넓어진 1825mm였지만 길이는 무려 115mm 줄어든 4865mm였다.

그랜저의 차체가 짧아졌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자동차의 길이는 차를 운행할 때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다. 회전반경이 커져 좁은 길에서 U턴할 때 불편하고 아파트나 백화점에서 주차할 때도 남들 한 번에 세울 것을 두 번, 세 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야 하는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특히 운전에 미숙한 운전자들은 차를 고를 때 긴 차는 우선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다.

짧아진 그랜저, 운전하기 쉬운 그랜저가 나오자 그동안 그랜저 뒷좌석에 앉아 신문을 보던 운전자들과 남들 시선의식해 쏘나타를 몰고 다니던 부유층 운전자들이 하나둘 그랜저XG의 운전석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한편 그랜저의 뒷좌석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한 상류층들은 뉴그랜저를 고급스럽게 튜닝한 ‘다이너스티’의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 이제는 ‘회사원의 차’

그랜저TG는 갑작스레 세상에 나왔다. 2004년 나온 NF쏘나타가 돌풍을 일으키며 현대차의 ‘싸구려 자동차 메이커’ 이미지를 ‘이제 제대로 된 차를 만들 줄 아는 메이커’로 바꾸고 있을 무렵인 2005년 그랜저TG는 NF쏘나타와 비슷한 모습의 ‘패밀리룩’을 선보였다.

심플하고 ‘만만해진’ 디자인에 기업체 간부급 샐러리맨들이 하나둘 그랜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랜저는 월급쟁이에게 부담스러운 브랜드였다.

입사 12년차인 회사원 최모 씨(39·서울 마포구 용강동)는 1년 전 3000만 원이면 그랜저를 살 수 있었으나 3500만 원짜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선택했다. 그는 “젊은 놈이 그랜저 탄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워서 돈을 더 썼다”고 했다.

‘그랜저’라는 차명에 대한 부담감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2008년 나온 제네시스가 과거 그랜저XG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올해 초 나온 그랜저HG는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그랜저TG보다 더욱 강력하게 ‘각 그랜저의 로망’에 사로잡힌 월급쟁이 중년들의 사정권에서 그들을 유혹하고 있다.

“현대차의 마케팅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랜저가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어떤 차를 보고 꿈을 키울까요?”(조 씨)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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