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40대 남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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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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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학연구원 - 마포 성미산 공동체 인문학 강좌 가보니
“불혹 아닌 부록 같은 세대 삶에 대한 주체성 찾아야”

과묵했던 ‘아빠’들이 수다를 떨며 자신의 내면을 인문학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40대 남성만을 위한 인문학 강좌 참가자들과 진행을 맡은 40대의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오른쪽에서 첫 번째).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과묵했던 ‘아빠’들이 수다를 떨며 자신의 내면을 인문학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40대 남성만을 위한 인문학 강좌 참가자들과 진행을 맡은 40대의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오른쪽에서 첫 번째).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40세를 불혹(不惑), 50세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그럼 65세는 무엇일까. 정답은 지공.‘지하철 공짜’라는 뜻에서 웃자고 만든 이야기다.” “이제는 40세도 ‘불혹’이 아닌 ‘부록’이라고 한다.” 5일 밤 열린 ‘마을 인문학 강좌: 불혹? 부록?’에서 나온 말이다. 오직 40대 남성만 참가할 수 있었다. 장소도 특이했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에 위치한 상가 건물 옥탑 카페, ‘살롱 드 마랑’. 마랑은 마포 사랑의 준말이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성미산 지역공동체 ‘사람과 마을’이 공들여 준비한 마을인문학강좌 ‘40대 이후 남성, 그리고 가족, 불혹? 부록?’의 현장이다. 최초의 40대 남성 전용 시민 인문학 강좌다.》

이 날 오후 7시 반 옥탑 카페 안으로 직장을 마친 ‘아빠’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의사도 왔고, 공무원 자영업자 그리고 옥탑 카페 주인도 왔다. 강의를 맡은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도 49세다.

‘불혹? 부록?’은 4월 한 달 네 차례에 걸쳐 주 1회씩 진행된다. 5일 ‘생애에게 말 걸기: 스토리텔링’, 13일 ‘10년 후의 나를 보다: 상상일기’, 20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싱크카페’, 27일 ‘이야기 한마당: 전망 찾기’ 순서로 진행된다.

“40대 남성 이외 출입 금지죠”라고 말하며 쾌활하게 웃는 운영위원장 위성남 씨(47)는 이번 프로그램의 기획자다. 그는 “40대는 자라나는 아이들과 다가오는 노년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세대다. 그런데 가정과 직장에서 점차 잊혀져 간다는 위기의식은 우리 40대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고민거리다”라고 기획의도를 말했다. 주부들을 위한 강좌와 행사는 많아도 남성을 대상으로, 그것도 40대로 한정한 프로그램은 생소하다는 반응에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느냐”며 또 웃어넘긴다.

13명의 참가자가 옥탑 카페 마룻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처음엔 침묵이 흘렀다. 역시 과묵한 아빠들이다. 한자리에 모이니 다소 어색한 듯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벽엔 1961년도 영화 ‘웨스트사이드스토리’의 포스터가 걸려 있고 10년도 더 돼 보이는 ‘백귀야행’, ‘북두의권’ 등 만화책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렇게 15분쯤 흐른 뒤 김 교수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나무 팽이를 끈으로 감아 돌렸다. ‘왕년’에 팽이 좀 돌려본 솜씨다. 입을 굳게 다물고 벽만 쳐다보던 40대 남성들의 표정에 순간 ‘아 옛날이여’라는 생각이 스치는 듯 하나둘씩 ‘소싯적 이야기’를 꺼낸다. 팽이 박사, 비석치기 달인들의 확인할 수 없는 추억 얘기에 분위기가 들뜬다.

어느새 참가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무 책상에 추억의 물건들이 놓여 있고 하나씩 골라잡은 참가자들은 왜 이것을 잡았는지 자신의 생을 곰곰이 돌아본다. 성냥을 잡은 카페 주인 조경민 씨(42)는 “1980년대 그 시절은 모든 카페에 성냥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성냥처럼 점점 잊혀져 가는 게 내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나막신을 잡은 한정훈 씨(42)는 “정신없이 일하고 집에 올 때면 해진 신발을 신은 내 모습에 울적해진다”고 말했다. 반쪽짜리 나무 인형을 든 의사 이정희 씨(45)는 “늘 반쪽인형처럼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때문에 쫓기며 살진 않았을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말하는 등 각자 자신의 ‘생애에게 말을’ 걸었다.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김 교수의 농담. “동창회 가서 40대 친구에게 절대 물어선 안 될 3가지 질문. 첫째는 ‘요즘 뭐 해?’, 둘째는 ‘마누라는 잘 지내?’, 마지막은 ‘애들 공부 잘하냐?’는 질문이다.” 청중이 한바탕 웃고 나서 김 교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세대의 불안은 윗세대가 살았던 시대처럼 우리가 살지 못한다는 데서 나온다. 아버지와의 괴리보다 내 자식과의 괴리가 더 크다. 이럴수록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데 이 시대의 40대들은 (그 질문을) 할 여력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오후 9시 30분, 이날 순서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크레파스를 집은 ‘아빠’들은 흰 도화지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삶을 색깔로 표현하는 ‘난해한’ 과제를 받았기 때문. 그러나 곧이어 서툰 손놀림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가기 시작했다.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스럽게 발표하는, 아니 ‘수다’ 떠는 시간이 이어졌다. 40대 부분을 온통 검은색과 빨강, 파랑을 뒤섞어 칠한 문치웅 씨(41)는 “1991년 스물한 살 때부터 학생운동을 하며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 때문에 경주교도소에 1년 반 수감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열정과 꿈을 잃어버린 지금이 내게는 더 힘들다. 하지만 오늘 내 삶에 대한 주체성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불혹? 부록?’ 인문학 강좌는 기존의 일방적 강의 형식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사업단 김영선 교수는 “자기 경험을 언어화하는 것, 퇴화되어 버린 주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마치 ‘부록’ 같은 존재였던 40대 남성들이 스스로 살아보자며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는 면에서 새로운 인문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프로그램이 40대뿐만 아니라 각 세대가 각자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해 나가는 일종의 파일럿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관계 맺기와 유지하기’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드는 역할이 시민 인문학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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