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씨 가마터 순례기… ‘나, 깨진 청자를 품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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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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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가마는 호족들의 사업체… 수익보다 위세 과시가 주목적”

저자 이기영 씨가 전국의 초기 청자 가마터를 돌며 모은 청자 사금파리들. 사진 제공 효형출판
저자 이기영 씨가 전국의 초기 청자 가마터를 돌며 모은 청자 사금파리들. 사진 제공 효형출판
그의 책에는 온전한 청자의 모습이 없다. 모두 부서져 흙이 묻고 문드러진 사금파리(깨진 도자기 조각)뿐이다. 그가 찾아간 곳은 청자박물관이 아니라 1000여 년 전 청자를 구웠던 가마터이기 때문이다.

한국도자재단 이사이자 이기영그릇제작소 대표를 맡고 있는 이기영 씨(58)가 전국의 옛 청자 생산지를 돌아본 가마터 순례기 ‘나, 깨진 청자를 품다’(효형출판)를 펴냈다. 자신의 유년시절 추억이 깃든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서 시작해 전라, 충청, 경기 등 전국 22곳의 초기 청자 가마터와 그곳에서 생산된 자기의 흔적을 톺아봤다.

강가, 바닷가, 두메산골과 같이 외딴 곳에 자리한, 발굴이 끝난 가마터에는 도편과 갑발(도자기를 구울 때 담는 큰 토기)만이 즐비하다. 수시로 길을 잃고 인적 없는 산을 오르고 황량한 구릉지를 헤매는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저자는 가마터를 찾아간다. 그는 “청자를 만들던 나의 조상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욕망의 갈림길, 청자 가마터 기행’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는 청자에 숨겨진 당대의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읽어낸다. 그는 고려청자가 이미 그 태동기부터 ‘군산복합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본다. 신라 말, 청자 제조에 처음 손을 대 대형 공장을 짓고 본격적으로 청자사업에 뛰어들려 했던 청해진의 장보고가 그 효시다. 장보고 자신이 그 야심 찬 계획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고려시대 들어 세력을 키우려는 각 지방 호족들에 의해 실현된다. “청자 공장은 당시 어지간한 호족이라면 누구나 운영하던 사업체였다… 상당수의 가마는 수익보다 과시가 주목적이었다.”

이런 가마터들을 돌며 저자는 1000여 년 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와 돈을 매개로 치열하게 경쟁했던 고려 호족들의 ‘자유와 욕망’을 들여다본다. 가마터의 위치, 크기, 형태, 구워낸 그릇의 사금파리를 통해 그 치열함을 읽어낸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한 벽촌에서 찾아낸 왕규의 가마터는 ‘한순간 허물어지는 욕망의 탑’의 전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사돈이었던 대호족 왕규는 경쟁 호족들의 눈을 피해 외진 마을 서리에 가마를 짓는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청자와 백자, 벽돌가마와 흙가마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가마는 왕규의 몰락과 함께 10년 만에 폐허가 된다. 청자와 백자가 섞인 5∼6m 깊이의 사금파리에서 저자는 왕규의 짧고 다난했던 정치적 성쇠를 읽어낸다.

저자의 시선은 거시적 역사를 넘어 청자를 하나하나 구워냈을 도공들에게도 미친다. “어렵게 가마터를 찾아내면 난 짜릿한 흥분에 전율한다. … 오랜 세월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무명 도공의 인내심… 물레를 돌리는 도공의 갈라진 손마디가 떠오른다. 망친 그릇을 깨부수는 맥 빠진 한숨도 들린다.”

저자는 본디 경제학자다. 서강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2대학에서 발전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경제연구원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다. 이후 경기개발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세계도자기엑스포 관련 연구와 자문에 응하면서 불혹의 나이에 도자기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청자라는 그릇의 가치보다 그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 같은 이력 때문인지 모른다. “난, 청자가 우리 역사의 블랙박스라 생각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금파리, 깨진 갑발에서 그가 본 것은 호걸들의 거침없는 말발굽 소리, 숨쉬는 욕망, 그리고 도공들의 체취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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