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의 향기]중세 유럽 순교자 시신은 구원의 메시지 “함께 묻히면 부활” 성인유골 도둑질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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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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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도둑질
패트릭 J 기어리 지음·유희수 옮김 282쪽·1만8000원·도서출판길

한 성직자가 순례여행을 하던 중 성인(聖人)의 유해가 안치된 마을 혹은 도시에 들른다. 성인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성직자는 유골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밤중을 기다렸다 유골을 탈취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의 신도들은 환희에 차 성인을 맞이하고, 성인은 이들을 위해 기적을 베푼다.

이 같은 이야기는 중세 중기(대략 9∼11세기) 유럽에서 최소한 100편 이상 발견된다. 대부분 유사한 이야기 틀을 갖추고 있어 한데 묶을 수 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런 ‘거룩한 도둑질’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 합리화됐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당대 사회상을 밝힌다.

성유골 도둑질이 성행한 것은 수요 공급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약속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최후의 날에 순교자들이 본래의 육체를 회복할 것이라 여겼다. 지상에 존재하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시신은 구원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였다. 당시 신자들은 그 유해 곁에 묻히면 함께 부활할 수 있다고도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된 뒤에는 새로운 순교자가 생기지 않았다.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성인을 갑자기 내세워 숭배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기존의 성유골을 자신들의 교회나 수도원으로 옮겨오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9세기 유럽은 카롤링거 왕조가 몰락한 뒤 강력한 중앙정부 없이 전역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이 시기 성인은 중앙권력 대신 지역사회와 교회, 혹은 수도원을 보호해주는 존재였다. 성인 숭배, 그리고 숭배의 구체적 대상인 유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성유골 전문 도굴꾼과 장사꾼이 성업할 정도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성유골 상단이 조직돼 알프스 산을 넘나들며 로마 묘역에서 유골을 수집했다. 각 수도원 축제일에 맞춰 수도원을 방문해 축제를 찾은 순례자에게 유골을 팔기도 했다.

수도원이나 지역사회가 직접 도둑질에 나서기도 했다. 인근 수도원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자기 도시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성 레위나 유골 이전기’에는 수도사들이 훔친 유골을 들고 지역을 순회하자 성인이 각 지역에 기적을 베풀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수도사들이 유골로 헌금을 모아 수도원 건축비 등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도둑질 이야기는 이 같은 행위를 변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생겨났다. 성인 본인이 나타나 유골 이전을 허락한다든가, 유골이 있던 기존의 환경이 열악해 유골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옮겼다는 식이다. 소유권 분쟁이나 도둑질을 하며 겪은 모험이 적혀 있어 성유골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그처럼 소중한 성유골을 지니고 있다는 지역사회의 자부심을 높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 같은 성유골 이전기를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통과의례에 따라 분석한다. 성유골은 도둑질을 통해 본래 있던 곳에서 분리된다. 한동안 그 정체를 의심받고 또다시 빼앗길 위기에 처하는 등 불확실한 상태를 거친다. 마침내 지역사회로 이전된 뒤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등 수호성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완전히 통합된다. 분리-경계-통합의 과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동안 성행하던 성유골 도둑질은 11세기를 지나며 서서히 사라진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나타나면서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됐던 성인숭배의 필요성이 낮아졌고 미신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둑질과 신앙이 공존하는 이 모순에 대해 저자는 “그 모순이 무엇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즉 당시 사람들이 엮어간 삶의 피륙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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