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한옥과 한옥 사이 ‘파격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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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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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재동 상업건물 ‘딕타’의 건축철학

동쪽에서 바라본 입면. 따로 떼어놓고 보면 주변의 한옥과 불화를 일으킬 것 같은 부정형의 생김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행인의 시선 속에서 혼자 튀지 않는다.
동쪽에서 바라본 입면. 따로 떼어놓고 보면 주변의 한옥과 불화를 일으킬 것 같은 부정형의 생김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행인의 시선 속에서 혼자 튀지 않는다.
한옥 길의 끄트머리는 꼭 한옥으로 맺어야 할까.

오랜 세월 모여 쌓인 한옥으로 이뤄진 길에 벌어진 틈새는 한옥으로 메우는 것이 안전하고 수월하다. 공간이 간직해 온 세월을 거스를 경우 받게 될 곱지 않은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간단한 변형이라도 덧붙이면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에 최근 문을 연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의 주거 겸용 상업건물 ‘딕타(dicta)’는 그 쉽고 편한 길을 피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둘러싸고 도시한옥이 다닥다닥 붙은 역사문화미관지구. 골목 끝에 새로 앉은 건물은 한옥이 아니다. 그러나 땅이 품은 시간의 맥락을 무시하거나 거스르지 않았다.

이 건물이 추구한 태도는 설계자인 김헌 스튜디오 어싸일럼(asylum) 대표(50)가 붙인 프로젝트 키워드에 뚜렷이 드러난다. ‘dicta’는 ‘격언’을 뜻하는 ‘dictum’의 복수형이다. 육면체 솔리드를 여러 각도의 엇갈린 사선 방향으로 깎아낸 듯 보이는 부정형의 외피는 독특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리 튀어 보이지 않는다. 서북쪽으로 뚫린 한옥 길을 따라온 행인도, 남쪽에 면한 헌법재판소 옆길을 통해 슬슬 접근한 사람도,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며 걷지 않으면 이 건물의 기척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무심히 스쳐 지나버릴 수 있다. 건물의 형태를 결정지은 사선의 원형(原形)을 주변의 길과 이웃집 돌담, 옹기종기 엇갈려 붙은 기와지붕들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푹 삭힌 듯 어두운 빛깔의 돌 붙임 외피도 이웃한 기와의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낸다.

“겸허하게 스며드는 듯한 몸가짐을 가진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나는 이웃과 조금 다르게 생겼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로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앉은 건물. 문화재 전문가, 관청, 건축주의 까다로운 견제와 요구사항을 ‘격언’으로 받아들여 공간을 다듬은 것이다.”

치렁치렁한 은회색 단발을 멋스럽게 늘어뜨린 김 대표는 얼핏 한옥 등의 전통 건축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축가다. 차림새나 외모만이 아니라 그가 내놓은 일련의 건물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서구적인 스타일을 보여 왔다. 김 대표는 설계작업에 거의 언제나 이번 ‘딕타’처럼 프로젝트 키워드를 부여했다. 경기 가평군의 주택 프로젝트에는 ‘lacuna(빈틈)’, 서울 송파구의 다세대주택에는 ‘inocula(접종체)’, 서초구에 지은 단독주택에는 개인의 기억과 종(種)의 기억을 합친 기억을 의미하는 ‘mneme’란 키워드를 붙였다.

촘촘히 붙어 앉은 한옥 사이에 한옥이 아닌 모양새로 앉아 길의 맥락을 거스르지 않는 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새로 들어선 주거 
겸용 상업건물 ‘딕타’는 땅에 주어진 제약을 디자인의 콘셉트로 끌어안아 활용한 사례다.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촘촘히 붙어 앉은 한옥 사이에 한옥이 아닌 모양새로 앉아 길의 맥락을 거스르지 않는 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새로 들어선 주거 겸용 상업건물 ‘딕타’는 땅에 주어진 제약을 디자인의 콘셉트로 끌어안아 활용한 사례다.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여러 함의로 해석할 수 있는 표제어를 콘셉트로 삼아 출발하는 것이 일을 진행하는 데 여러모로 편리하다. 주어진 장소나 프로그램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나의 건물을 지으면서 끝없이 마주치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 단어가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개인이 선택한 콘셉트를 지켜내면서 건물을 짓는 건축가는 별 소득 없이 큰 부담을 져야 한다. 한옥지구처럼 주변 공간의 맥락이 견고한 땅에서는 몇 배로 힘이 드는 선택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2005년 완공한 경주 양동마을 교회에서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전통마을에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형태의 교회를 만드는 계획. 채도 낮은 푸른 빛깔의 이 건물은 우려와 달리 이웃한 한옥의 처마 아래 풍경을 더 정갈하게 다듬어 주는 요소가 됐다. 어떤 경우에든 ‘독특하지만 겸허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그의 건축 태도가 유구한 전통마을에도 아무 탈 없이 스며든 것이다.

내부 계단 역시 ‘한옥 길’이라는 풍광에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틈새로 난 창밖 기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진 제공 스튜디오 어싸일럼
내부 계단 역시 ‘한옥 길’이라는 풍광에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틈새로 난 창밖 기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진 제공 스튜디오 어싸일럼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면서도 주변과 섞이는 것. 건축가가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한 최고의 품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닿아야 할 지점이다. 그것은 어떤 타협이나 스타일리시한 미장센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은 건축가가 얼마나 깊고 폭넓게, 치열하게 사고했느냐에 달린 것이다. 대학원 강의를 할 때 다른 내용 없이 오직 ‘생각하는 법’만 훈련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건물 앞을 천천히 걸어보면 안다. ‘안이한 과거의 답습을 벗어나 한옥 길의 새로운 확장을 모색했다’는 둥의 뻔한 수식은, 부질없다. 이웃집 담과 마주한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오밀조밀한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김 대표는 그 구석구석의 소리가 타인에게 이해받는지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건축가다. 설계사무소 간판을 ‘정신병동’이란 뜻의 ‘asylum’으로 붙인 것도 ‘사회의 통념과 소통하는 데 수월하지 못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소’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힘들지 않냐고? 당연히 지친다. 소통에 재주가 없으니 일도 잘 안 들어온다. 하하. 그러나 소통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관입(貫入·꿰뚫고 들어감)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이다. 누가 새로운 건축을 추구했는지는 다음 세대가 평가할 일이다. 나는 내 건축으로 내가 생각하는 새로움을 ‘기록’할 따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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