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사람과 사람의 숲에 사랑의 다리를 놓다

  • Array
  • 입력 2010년 11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내 젊은 날의 숲/김훈 지음/344쪽/1만2000원/문학동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연주 씨군요.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메말랐다. 그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음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 대상을 단지 사물로서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밀쳐내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불러서, 내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다 나를 주저앉히는 듯했다.’

우리는 한국문학에서, 막 사랑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장면을 또 하나 갖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릴 때, 여자는 ‘대상을 단지 사물로서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밀쳐내는 힘’을 느낀다. 그 이름을 부르는 남자와의 거리를 벌려놓는 그 목소리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마음에 간절함을 불어넣는다. 여자가 남자를 어떻게 느끼는지 작가는 함구하지만 우리는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순간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

김훈 씨(62)가 연애소설을 쓴다는 소식은 문단에 많이 알려졌다. 김훈 하면 남성서사인데, 어떤 사랑의 소설을 만들어 낼지 관심이 적잖았다.

장편 ‘내 젊은 날의 숲’의 주인공은 수목원의 세밀화 작가다. 수목원이 동부전선의 남방한계선에 잇닿은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어 화가는 군인들과 지내고 있다. 소설은 화가 여성이 뇌물죄로 수감된 아버지가 이감된 것을 뒤늦게 아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상의 비루함과 몸을 섞어야 했던 남성의 쓸쓸한 삶에 대한 묘사는 김 씨의 앞선 글들에서 자주 발견됐던 부분이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로 시작된 작품은 무게중심을 그 남성의 딸에게로 옮겨간다. 수목원에 취직해 직원아파트에서 살게 된 화가는 자신을 채용한 수목원의 연구실장인 안요한에게서 아들 신우의 미술지도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혼한 실장은 학교에 적응 못 하고 외톨이로 지내는 신우가 늘 걱정이다.

그리고 화가 여자 옆에는 김민수 중위가 있다. 김 중위는 화가가 수목원에 온 첫날 맞아준 사람이다. 그는 전사자의 유해 발굴 작업 중 시신의 뼈를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하고, 죽은 숲 해설사의 빈소에 같이 가자고 전화한다. 화가 여자의 마음은 자주 안 실장에게 가 있고, 김 중위는 그런 여자의 주변을 서성인다. 작가는 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하고, 말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사람들의 ‘풍경’을 글로 그리면서, 독자로 하여금 사랑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도록 한다. 김 중위가 “저는 12월에 제대합니다”라고 거듭 말하게 함으로써 화가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독자가 엿보도록 하고, 안 실장의 전처가 아들의 얼굴을 꼭 닮았음을 화가가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닿을 수 없는 연모의 절망감을 독자가 안타까워하도록 한다.

‘주님의 사랑’(화가의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설정됐다)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다. 그러나 깊이 새겨진 사랑의 무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갈구한다”고 작가가 밝혔으니 다음 연애소설이 더욱 기대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