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집단자살로 얼룩진 과거…광기와 욕망의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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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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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하성란 지음/284쪽·1만2000원/자음과모음

“이 냄새다. 밭에 뿌려놓은 분뇨나 웅덩이에 고여 썩어가는 오수 냄새, 풀숲 건너에서 짐승의 사체가 부패하며 내는 냄새, 단맛이 들어가는 과일향 사이사이로 내 후각은 대번에 이 냄새를 가려냈다.”

이야기는 오래된 시멘트 공장, 신신양회에서 시작한다. 한때는 공장 굴뚝에서 쉴 새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공장에 딸린 식당에서는 음식 하는 여자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던 곳.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는 폐허의 냄새만이 풍긴다. 공장이 문을 닫은 건 단지 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살며 아이를 키우던 여자들, 그 여자들을 거두었던, 공장 대표이자 ‘어머니’로 불렸던 인물, 그리고 공장장들과 삼촌까지 한날 한시 공장 다락방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경찰은 조사 끝에 공장이 일종의 신흥종교집단이었으며 삼촌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을 맨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공장이 위태롭던 참이었다.

소설은 1987년 8월 경기 용인시의 공예품 공장인 오대양에서 대표와 가족, 종업원 등 32명이 시신으로 발견된 이른바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사건의 원인을 밝혀나간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가 10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로 계간 ‘자음과모음’에 2008년 가을호부터 2010년 봄호까지 연재됐다.

주인공 ‘나’는 그날 사건에서 홀로 살아남은 목격자 아닌 목격자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어릴 적 종양으로 시력을 잃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날 자신의 목을 휘감았던 축축하고 기분 나쁜 손길을 기억한 채 ‘나’는 삶을 이어간다.

1987년에 발생했던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10년 만에 장편을 발표한 작가 하성란 씨. 사진 제공 자음과모음
1987년에 발생했던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10년 만에 장편을 발표한 작가 하성란 씨. 사진 제공 자음과모음
몇 년이 지나 신신양회가 42주년을 맞은 해, 주인공의 이복언니 서정인이 신문에 그때 죽은 여자들의 아이를 찾는 광고를 낸다. 형제자매처럼 함께 나고 자랐지만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유일한 남자아이였던 태영, 언제나 아이들을 이끄는 입장이었던 은영, 그리고 ‘나’까지 어른이 된 아이들은 모두 예전을 그리워하며 공장에 모인다. 함께 모인 뒤 ‘나’는 다소 엉뚱한 아이디어를 꺼내놓는다. 남자 없이도 아이를 낳아 키우던 예전 공장처럼 남자들과 접촉해 새로운 아이를 낳자는 것이다.

공장은 예전의 활기를 되찾고 태영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번창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공장이 똑같은 몰락의 길을 밟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예전의 신신양회 역시 순식간에 성장했지만,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금세 몰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해지는 정인과 태영, 은영, 그리고 그들과 대립하는 ‘나’의 모습, 이들을 둘러싼 주변의 시선….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독자는 과거의 죽음이 결코 신흥종교집단의 광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훨씬 더 ‘사회적인’ 죽음이었다. 치밀한 묘사와 호흡, 빠른 전개가 ‘이것이 사건의 진실이었다’라고 믿게 하는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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