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행복을 찾으려면?… 다시 莊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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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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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삶의 문제 해법 제시
번 역본-독법가이드 잇단 출간

주석 배제한 생생한 원문 이채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도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돼 훨훨 날아다녔다. 갑자기 꿈을깨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됐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 부른다(책 ‘장자’에서). 그래픽 권기령 기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돼 훨훨 날아다녔다. 갑자기 꿈을깨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됐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 부른다(책 ‘장자’에서). 그래픽 권기령 기자
산속 깊은 곳, 도처에 숨어 있는 옹달샘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맛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든 옹달샘 물을 골고루 마시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어떤 사람은 노화 방지에 좋다고 소문이 난 동쪽 옹달샘을 찾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피부 미용에 좋다고 알려진 서쪽 옹달샘 물을 마실 것이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고전들이란 고유한 맛을 지닌 다양한 옹달샘들을 닮은 것 아닌가 하고. 우리가 어느 옹달샘을 선호하는가는 두 가지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는 옹달샘이 어떤 고유한 맛을 가지고 있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가 어떤 맛의 옹달샘을 필요로 하느냐다. 고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고전들 각각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통찰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대마다 인간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절박한 삶의 문제를 성찰하기에 적합한 특정 고전에 열광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공자와 관련된 유학 고전에 심취했었다. 그것은 우리가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상징되는 선비의 기상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얼마나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동요되었다면 유학자의 당당함을 갈구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최근 들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제 우리 이웃들은 장자라는 옹달샘에 기웃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독자의 기호에 가장 민감한 출판계에서 연이어 장자와 관련된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권의 책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 권의 책은 장자의 사유를 기록하고 있는 고전 ‘장자’의 번역서이고, 다른 두 권은 ‘장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가이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최초로 ‘장자’를 완역했던 원로 중문학자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존 번역을 새롭게 고치고 다듬어 ‘장자’ 완역본을 확정했다. 기존의 번역서들은 곽상(郭象)과 성현영(成玄英)으로 대표되는 과거 주석가들의 의미론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 달리 김 교수의 번역은 ‘장자’ 원문에 충실하고자 했던 전목(錢穆)이나 왕숙민(王叔岷)의 언어학적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래서 그런지 김 교수의 번역은 해석된 장자가 아니라 장자의 육성을 직접 듣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의 번역을 읽다 보면 은퇴한 노학자가 ‘장자’ 완역본을 확정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주려는 배려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 우리 이웃들은 다시 ‘장자’를 읽으려고 할까? 그것에 대한 상징적인 해답은 두 권의 장자 해설서, 이인호 한양대 교수의 ‘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과 중국철학 전공자 나카지마 다카히로 씨의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교수와 나카지마 씨는 모두 지금이 ‘장자’를 새롭게 읽어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내건 이유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들이 ‘장자’라는 동일한 고전을 다루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 교수는 행복하기 위해서 욕망을 줄여야 한다고 장자가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카지마 씨는 장자의 행복이란 타자와 새로운 연대를 맺는 즐거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교수의 장자 해석이 행복을 우리 마음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라면, 나카지마 씨의 해석에 따르면 장자가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고독한 내면의 문제만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수와 나카지마 씨의 해석 중 어느 것이 장자에 근접한 것일까?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이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와 일본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먼저 이 교수의 책을 넘겨보도록 하자. 그의 ‘장자’ 독해는 개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기 힘든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슬픈 자각을 전제로 한다. 욕망이 충족되거나 혹은 욕망이 충족될 가능성이 크다면 우리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욕망이 충족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지속되어 행복의 전망이 어두워질 때, 누구나 본능적으로 불행을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장자는 그 해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충족될 수 있을 만큼 욕망을 줄인다면, 누구나 작은 행복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심리적 방법인 셈이다.

반면 나카지마 씨의 장자 해석은 일본 사회가 수평적인 연대를 모색할 정도로 원자화되어 상호 무관심한 개인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다. 고독한 개인들이 그렇지 않은 개인보다 행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는 장자로부터 고독한 개인의 내면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새로운 연결에서 행복한 주체와 즐거운 세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을 읽어내려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통찰이 현대 프랑스철학자 들뢰즈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일 아닌가? ‘장자’라는 동일한 옹달샘에서 이 교수와 나카지마 씨가 전혀 다른 맛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만큼 ‘장자’는 심원한 고전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 교수의 완역본을 다시 넘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장자’로부터 이 교수와도 다르고 나카지마 씨와도 다른 새로운 맛을 길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새롭게 얻은 맛은 우리의 삶을 보듬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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