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 타도 민주 발전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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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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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사관 문서 발견 홍석률 교수
대학생-언론인 등 면담기록… 당시 지식인 생각 엿보여

“대규모 발포가 있기 전에는 학생들은 요구를 전하고, 대화하고, 항의하러 경무대 앞으로 간 것이지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관 문서에 드러난 대로 경무대가 대화 요구를 거절하고 발포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의 죽음에 퇴진으로 책임지라’는 정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미대사관 문서를 번역한 성신여대 사학과 홍석률 교수(45·사진)는 “혁명의 승패가 가려진 뒤에는 사람들이 그 결과를 가지고 당시의 기억을 짜 맞추는 성향이 있다”며 “언론 보도 등 당시 작성된 기록을 살펴야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생들의 면담 요구를 수용했다면 19일의 대규모 유혈 사태는 없었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유학 당시 미국 국립문서관 수장고에서 4·19혁명 관련 외교문서들을 복사한 뒤 최근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이를 번역했다. 이용운 해군 참모총장과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 등 일부는 기밀로 분류된 것들이다.

“이번 문서 중에는 1960년 4월 19∼25일 미대사관 관계자들이 한국의 학생, 여론 지도층들을 만나 인터뷰한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사태의 해결책으로 주장한 사람은 백낙준 연세대 총장뿐입니다.”

홍 교수는 고려대 유진오 총장, 연세대 백낙준 총장, 서울대 신태환 법대 학장, 민영규 연세대 사학과 교수, 언론사 간부, 서울대 법대생, 연세대 대학원생 등과의 인터뷰 기록을 발견했다. 홍 교수는 “백 총장 외의 인물들은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선이었고 이 대통령이 당장 사퇴할 이유는 없다고 봤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25일 마산에서 들고 일어난 할머니 시위대가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은 물러가라’고 플래카드에 쓴 것이 하야를 공식 슬로건으로 내건 첫 집회”라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4·19혁명은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 함께 이뤄지는 길로 나가는 초석이 됐다”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집권했지만 한국은 독재정권을 시민들의 힘으로 몰아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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