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로 일궈낸 우리 땅 - 우리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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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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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안개가 밀려오는 풍경을 그린 문봉선 씨의 ‘무(霧)4’. 사진 제공 금호미술관
자욱한 안개가 밀려오는 풍경을 그린 문봉선 씨의 ‘무(霧)4’. 사진 제공 금호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은은한 향이 코끝을 맴돈다. 먹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적묵법으로 완성한 검은 풍경에서 스며 나오는 먹의 향기다. 7m 넘는 수묵화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강의 물길이 흐르고 있다.

한국화가 문봉선 홍익대 교수(49)의 ‘청산유수(靑山流水)’전을 보고 나면 ‘나는 비록 먹을 갈고 있지만, 먹이 결국 나를 갈 것을 믿는다’는 작가노트의 한 대목이 실감난다. 직접 벼루에 먹을 갈아 완성한 대작이 즐비한 전시장. 먹의 사유와 정신을 녹여낸 수묵의 다양한 실험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하나만 먹으면 편식이다. 동서양을 아울러야 방향감각이 생긴다. 수묵화는 예나 지금이나 전통과 현대라는 두 가지 지향점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지속될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결코 멍에가 아니다.”

흑백의 대비, 채움과 비움의 미학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 수묵으로 그린 동양화인데 서양화처럼 재료의 질감이 느껴지고 구상이면서 추상적이다. 30여 년 동안 전통의 긴 터널을 샅샅이 발로 답사한 뒤 이를 현대적으로 수용하는 실험을 거듭해온 작가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의 세 벽면을 휘휘 감은 36m 길이의 임진강 풍경, 24m 길이의 한강 풍경은 유장한 대하소설처럼 묵직한 울림을 길어 올린다. 더불어 비오는 날 소쇄원 풍경, 늘어진 수양버들의 운치를 드러낸 버드나무 연작, 텅 빈 화면에 충만함을 표현한 안개 연작 등은 서정시처럼 단아하다.

“나는 자연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저녁노을과 새벽공기의 상큼함 등을 몸으로 체득한 뒤 먹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3000년 역사를 가진 먹의 생명력과 가능성을 확신하는 작가. ‘덜 긋고 덜 그리는, 비우고 또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극점을 향해서’ 그는 오늘도 먹을 간다.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은 농부다. 내 그림도 땅에서 일군 거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 언덕, 강을 관심 있게 보면서 먹으로 일궈낸 작품들이다.”

전시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 02-720-5114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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