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백수끼리 뭉쳐 일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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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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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필독서 된 계간 ‘문헌과 해석’ 50호 눈앞… 창립멤버 만나보니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에서 성균관대 안대회, 서울대 이창숙, 서울대 이종묵, 성신여대 강혜선, 서울대 정병설 교수(왼쪽부터)가 모였다. ‘문헌과 해석’을 10년이 넘도록 지켜온 이들은 “50호까지 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재미를 좇아 공부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입을 모았다. 변영욱 기자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에서 성균관대 안대회, 서울대 이창숙, 서울대 이종묵, 성신여대 강혜선, 서울대 정병설 교수(왼쪽부터)가 모였다. ‘문헌과 해석’을 10년이 넘도록 지켜온 이들은 “50호까지 낼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재미를 좇아 공부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입을 모았다. 변영욱 기자
1997년 9월 30일 창간호를 낸 학술 계간지 ‘문헌과 해석’이 올해 봄 50호를 맞는다. 같은 이름의 연구모임이 국문학, 한문학, 과학사, 예술사, 서지학, 생활사 등 학문 분과의 경계를 넘어 모임을 해온 지도 벌써 13년을 넘겼다.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기존 자료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취지답게 이 모임은 사도세자의 마지막 친필,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어찰첩 등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등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50호째를 맞는 잡지 ‘문헌과 해석’은 이런 연구의 결과물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해왔다.

50호 발행을 앞두고 창립 회원인 이종묵 서울대, 안대회 성균관대, 강혜선 성신여대 교수와 창립회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병설 이창숙 서울대 교수가 17일 오후 서울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때 아닌 눈에 교수들은 “날씨가 이러니 매화가 다 지겠다” “지금이 딱 매화 보러 갈 때인데 가기도 힘들겠다”는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 ‘백수들 모임’이 ‘국학 연구자들의 필독서’ 내기까지

‘국학 연구자들의 필독서.’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문헌과 해석’을 출판하고 있는 태학사가 홈페이지에 내건 홍보 문구다. 하지만 이종묵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시작은 ‘백수들의 모임’이었다. “한국학 하던 친한 백수들끼리 ‘시간도 남는데 공부나 하자’고 모인 것이 계기였죠. 단, 전공의 경계를 넘어 함께 공부하며 시야를 넓혀 보자는 뜻이 있었습니다.”

1996년 여름 주로 국문학과 한문학을 전공한 학자 10여 명이 모임을 시작했다. 전공, 학과, 대학, 학력을 구분하지 않는 모임을 표방했다. 고문헌 연구가 박철상 씨처럼 전공자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연구를 해오던 ‘고문헌 마니아’들도 참여했다.

현재 문헌과 해석 ‘사장’(모임 대표를 가리키는 말)인 이창숙 교수의 전공은 중국 희곡이다. 이 교수는 “중국 문학을 하더라도 대부분 영인본으로 공부를 하는데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중국 고서를 보고, 초서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임 참가자들은 고문헌을 정확히 해석하는 데 초점을 뒀지만 뜻밖의 성과가 잇따랐다. 안대회 교수는 소나무 식목 정책에 관한 정약전의 책 ‘송정사의(松政私議)’를 발굴했고, 정병설 교수는 조선시대 화첩 ‘중국역사 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 서문이 사도세자의 죽기 전 마지막 친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9년 세상에 알려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도 이 모임의 회원들이 주도해 발굴해냈다.

“전공-학력 따지지 말자” 학자 아닌 개인 연구자도 참여
쉽고 자유로운 글쓰기로 고문헌 해석 새 지평
‘정조가 심환지에 보낸 편지’ 발굴 등 성과 수두룩


○ 학자가 즐기는 공부로 한국학 대중화에 기여

‘문헌과 해석’이 자리 잡을 무렵인 2000년대 초에는 조선시대 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졌다. 이창숙 교수는 “당시 관심에 학계가 화답하는 방식에서 ‘문헌과 해석’이 모범답안을 제시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글쓰기를 추구한다는 답안이다.

‘문헌과 해석’은 한국연구재단에 학술지로 등재돼 있지 않다. 그만큼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다. 실리는 글은 대체로 원고지 30∼50장 안팎의 짧은 글이다. 강혜선 교수는 “교수들은 점수를 따기 위한 논문 쓰기와 논문식 사고에만 치우치기 쉬운데 ‘문헌과 해석’에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50호를 기념해 회원들이 각자 문헌이나 그림, 사진 하나를 택해 자유롭게 쓴 글을 묶은 단행본도 기획 중이다.

정병설 교수는 이 책에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에서 본 그림 한 장에 관한 원고를 실을 예정이다. 그림에 등장한 선교사가 한국에 와 제대로 선교를 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사연이 있는 그림이다. “제 전공인 국문학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 전통 회화에 관한 글도 아닌데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래도 ‘문헌과 해석’이니까 받아주겠거니 하고 제가 정말 감동받은 그림에 대해 글을 쓰는 거죠.”

○ ‘무림의 고수’ 키울 일만 남아

안대회 교수는 2000년대 들어 한동안 ‘문헌과 해석’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후배나 제자들이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위해 빠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엔 너무 심심해서 다시 나가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후학을 키우는 일은 이들의 큰 관심사다. 정 교수는 “함께 공부하는 젊은 학자들이 내용도 바꾸고 형식도 바꿔 나가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앞으로는 특정 주제를 놓고 모든 시대를 아우르거나, 특정 시대를 놓고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연구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외국처럼 ‘석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종묵 교수는 “누군 초서를 잘 읽고, 누군 고문헌을 보는 눈이 밝고, 누군 글을 잘 쓰니 잘하는 걸 하나씩 주면 ‘무림의 고수’ 한 명은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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