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죄와 벌’ 산실… 대문호의 삶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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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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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집-산책로 등 고뇌와 창작의 공간 순례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기행

◇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이덕형 지음/424쪽·2만7000원·산책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이종접합의 도시다.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발트 해 진출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던 표트르 대제(1672∼1725) 이전에 이 지역은 황량한 늪지에 불과했다. ‘러시아 속의 유럽’을 표방해 야심 차게 건설된 이 도시에는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 신고전주의라는 유럽의 사조들마저 쇼윈도처럼 겹치거나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을 ‘러시아의 암스테르담, 북방의 팔리마, 새로운 로마’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겐 ‘표트르 대제의 급조물, 포툠킨의 모조품, 스키타이 땅의 촌스러운 연극무대’일 뿐이었다.

러시아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이질적으로 혼종된 이 모방과 복제의 도시 한복판을 거닐었던 대문호가 있었다. 바로 도스토옙스키다.

이 책은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도스토옙스키의 일대기다. 그의 흔적을 따라 도시를 탐방한 문학기행문이기도 하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이 도시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베냐민이 그의 미완성 저작인 ‘파사젠베르크’에서 썼던 ‘판타스마고리아’라는 개념을 통해 통찰한다.

환영이라는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물신(物神)’의 개념과 흡사하다. 베냐민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모더니티가 가장 잘 구현된 곳,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우선하는 상품 자본주의의 성소를 판타스마고리아란 개념으로 지칭했다.

저자는 모방과 복제로 탄생한 상트페테르부르크야말로 태생적으로 모순과 역설,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지닌 도시로 파악한다. 물론 공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에 이 도시에 처음 오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이곳의 환각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꼈을 것이다.

공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그곳 생활에 만족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 재미없고 냉담했다. … 빈틈없이 꽉 짜인 시간표, 공동식탁, 재미없는 선생님들. 처음에는 이 모든 것들이 날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했다. 길고 지루한 추운 밤을 밤새 울면서 지새우기도 했다.”

대신 그는 푸시킨과 발자크, 고골을 읽으며 습작을 계속한다. 스무 번 이상 집을 옮겨 다녔지만 한 번도 자신의 집을 갖지 못했던 그는 이 시절부터 낭비벽의 조짐을 보였다. 형편에 맞지 않게 세가 비싸고 큰 집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구상할 때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구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좁은 방안에서는 생각조차 답답해진다”고 믿었다.

저자는 출판업자들과 친지, 문인, 그리고 빚쟁이들로 들끓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집들과 거리의 산책로, 대작들 속의 배경을 꼼꼼히 훑으며 작가의 일생과 흔적을 되짚어간다. 작가를 꿈꾸던 시절 지냈던 폰탄카 샛강 옆 공병학교,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원고를 들고 비평가를 찾아가며 건넜을 아니치코프 다리, 생의 마지막 역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연재했던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 저자의 문학, 철학적 성찰과 함께 대작가의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도시 곳곳을 산책해볼 수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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