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세계화에 ‘진짜 韓食’이 없다”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서울 특1급호텔 요리사 6인에게 들어보니…

[포토]25만원짜리 전통궁중요리 대장금한정식
[포토]25만원짜리 전통궁중요리 대장금한정식
《“퓨전도 좋지만 우리 음식의 진면목을 찾아내 알린 다음이어야 한다.” “퓨전요리 중심의 프랜차이즈 업체가 한식 세계화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한식 죽이기’가 될 것이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한식 세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겨야 할 한식 요리사들이 오히려 뿔났다. 5월 4일 출범한 ‘한식 세계화 추진단’이 6개월 동안 각종 정책과 방안을 쏟아냈지만 정작 유명 한식 요리사들은 ‘한식 세계화’가 아닌 ‘한식 죽이기’를 우려했다. 더군다나 이 같은 요리사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만한 창구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서울시내 특1급 호텔 요리사들에게서 한식 세계화의 문제점과 대안을 들었다. 그들은 ‘정부의 조급증’을 지적하며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성과 급급해 퓨전에만 집착
‘음식과 약은 근원이 같다’는 한식 정체성부터 확립해야


○ “한식 세계화에 한식 요리사는 없다”


서울시내 특1급 호텔은 총 17개로 이 가운데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롯데, 쉐라톤그랜드워커힐, 메이필드, 르네상스호텔 등 4곳뿐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식 요리사 총 68명을 조사한 결과 그동안 한식 세계화와 관련해 단 1건의 자문이나 조언 요청도 없었고 의견 청취 수준의 접촉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춘식 워커힐 조리팀장(47)은 “호텔에서는 주로 외국인들에게 한식을 선보이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외국인의 입맛과 취향을 분석해 한식에 반영하고 있다”며 “이들의 경험은 한식 세계화에서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식 요리사들이 한식 세계화 추진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한식 세계화 작업이 프랜차이즈 업체를 중심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공무원과 교수, 기업인, 농어업인 등을 포함한 한식 세계화 추진단 위원 35명 가운데 호텔 한식 요리사는 1명도 없었으며 추진단을 보좌하는 자문단 33명도 교수와 기업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을 뿐 요리사는 전혀 없었다. 이재옥 워커힐 한식당 ‘온달’의 조리장(52)은 “한식 요리사들의 의견 개진 통로가 전혀 없기 때문에 요리사들이 강조하는 한식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고 쉽고 간단하게 퍼뜨릴 수 있는 정체불명의 퓨전요리들만 부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퓨전’ 바람에 눌린 한식의 정체성

호텔 요리사들은 공통적으로 ‘한식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 한식을 앞세워 세계로 나가기 전에 ‘무엇이 한식이냐’ ‘특징은 무엇이냐’ ‘어떻게 만들어야 제대로 된 한식이냐’ 등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이병우 롯데호텔 총주방장(54)은 “현재 국적 불명의 음식을 내놓는 해외 한식당이 대부분 퓨전이나 현지화에 묻혀 정체성을 잃고 있다”며 “일본 스시는 정체성을 강조해 세계화에 성공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한식당은 없지만 호텔에서 한식 메뉴를 제공하고 있는 그랜드앰배서더호텔의 심창식 조리부장(48)은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가 확고하다면 퓨전이 아니라 외국 식문화 각각의 단계에 적당한 우리 음식을 그대로 끼워 넣을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금희 메이필드호텔 한식당 ‘봉래헌’ 조리장(42)은 “식(食)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려는 데 2012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보겠다는 자체가 조급증이고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난데없이 ‘떡볶이’가 튀어나오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 ‘스타 셰프’ 양성과 ‘식약동원(食藥同源)’이 해법

긴 안목으로 한식 세계화를 본다면 지금은 퓨전 운운할 때가 아니라 한식은 물론이고 외국 문화에도 익숙한 젊은 ‘스타 셰프’를 키워야 한다는 것도 공통된 의견이다. 한식을 전문적으로 배운 스타 셰프가 여러 명 나오면 정부가 요란 떨지 않아도 한식 세계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 3개월짜리 단기 ‘스타 셰프 양성 프로그램’ 정도가 운영되고 있어 한식 세계화를 대표할 스타 셰프 양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호텔과 대학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셰프 양성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한 학생은 “프로그램이 급조돼 강의 질이 떨어지고 수강생들도 사장이나 기업 관계자 등 스타 셰프 양성 취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요리사들은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한식의 정체성은 ‘참살이(웰빙) 음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금희 조리장은 “양식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더 엄선한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 자체로 웰빙 음식이라는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음식과 약은 근원이 동일하다(식약동원·食藥同源)’는 선조들의 음식관에서 정체성을 확립해 가자는 것이다.

김성태 르네상스호텔 한식당 ‘사비루’ 조리장(48)은 “건강식이라는 측면에서 갈비보다는 비빔밥이 세계화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참살이 음식으로서의 한식은 해외에서도 긍정적이다. CJ푸드시스템이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에 지난해 문을 연 ‘웰리&돌솥비빔밥’은 공항 푸드코트 가운데 매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건강식으로 인기가 높다. 중국에서도 베이징의 비빔밥 전문식당 ‘대장금’이 ‘한식은 건강식’이라는 마케팅을 바탕으로 성공했다.


:한식 세계화 사업:


글로벌 외식 산업의 규모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식 산업은 영세한 규모에 머물고 있다는 인식에서 정부 주도로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명예회장을 맡았고 정부 부처, 학계 인사 등 35명이 추진단 위원을 맡고 있다. 한식 세계화 추진 관련 예산이 올해 농림수산식품부에 100억 원, 문화체육관광부에 20억 원이 배정됐고, 내년에는 농식품부에만 240억 원이 책정됐다. 농식품부 한식 세계화추진팀은 2008∼2012년을 4단계로 구분해 단계별로 한식의 산업화를 위한 법 제도 정비, 한식 이미지 제고 및 조리법 표준화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