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선교 바빠 의학당 강의 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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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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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美선교사들의 편지에 비친 최초의 병원 ‘제중원’
■ 김상태 교수 300여통 분석
조선인 마음 사로잡으려면 선교보다 학교-병원에 신경을
학생들 개종관련 집단자퇴 사태
음주 문제 등으로 본국 소환도

“병원이 며칠 후면 개원합니다. 지금까지 병원은 대성공입니다. 관리들과 백성들은 병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1885년 4월 알렌의 편지)

1885년 4월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광혜원(12일 뒤 제중원으로 바뀜). 이곳에서 일하던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로 활동하던 이들의 속사정과 제중원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기록된 편지가 미국 뉴욕 선교본부에 도착했다.

그 편지를 쓴 이들은 호레이스 알렌과 존 헤론, 호레이스 언더우드. 김상태 서울대 병원역사문화연구센터 교수는 미국 필라델피아 주 장로교회 사료보관소에 잠들어 있던 이들의 편지 300여 통을 처음으로 들여다봤다. 김 교수는 그 편지를 분석한 논문 ‘제중원 소속 미국인들의 편지-알렌, 헤론, 언더우드의 편지로 제중원을 읽다’를 23일 발표할 예정이다.

고종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정부병원으로 원활히 운영되던 제중원은 점차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1888년 제중원에서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를 잡아 살해한다는 소문이 퍼져 ‘영아소동’이 벌어진 뒤 제중원의 진료 실적이 현저히 떨어졌다. 헤론은 “시간이 갈수록 (선교보다는) 학교와 병원이 조선인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1889년 5월)라고 말했다.

“빈튼 의사는 병원이 가장 바쁠 때인 지난여름 내내 휴무했습니다. …빈튼은 이곳에 보내주신 사람들 가운데 최악의 인물입니다.”(1893년 9월 알렌의 편지)

의료진의 근무태도가 부실해 고민이라는 내용도 있다. 1889년 무렵 헤론은 개인병원에서 외국인 진료에 치중하느라 제중원에서는 하루 1, 2시간만 진료했다. 1891년 4월∼1893년 11월 근무한 캐드월러더 빈튼은 독실한 복음주의자로 의료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1888년 11월∼1889년 7월 근무했던 찰스 파워는 음주와 여자 문제로 미국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제중원의 의학당 운영도 벽에 부닥쳤다. 1887년 하반기가 되면서 알렌은 주미 조선공사관 참찬관(參贊官) 임무로, 헤론은 진료 때문에 강의에 나서지 못했다. ‘의학당’이라는 이름이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학생들 중 한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도 생겼다.

이번 분석으로 제중원이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구리개(지금의 을지로)로 이전한 시기가 1886년 가을이라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파워에 관한 기록도 처음 나온 것이다. 김 교수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보고서 형태이기 때문에 기록이 매우 상세하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병원은 철폐됐습니다. 이 나라 정부 역시 끝장이 났습니다. 23일 아침에 일본이 궁궐을 점령했고, 지금 그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습니다.”(1894년 7월 알렌의 편지)

1894년 7월 23일, 일본이 경복궁에 침입해 친청파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자 고종은 제중원의 운영권을 알렌 등 미국 선교사들에게 넘긴다. 김 교수는 “제중원을 일본에 빼앗길까 우려했던 고종이 선교사들에게 운영권을 준 뒤 되찾아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논문을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제3회 병원사 국제심포지엄 ‘편지로 만나는 의사와 의학’에서 발표한다. 가오시(高晞) 중국 푸단(復旦)대 역사학계 교수가 ‘의료선교사의 편지: 중국 해관 의학보고서로 보는 100년 전 동아시아 각국의 의료’, 기타야마 오사무(北山修) 일본 규슈(九州)대 인간환경학부 교수가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한 일본인들: 80년 전 일본인은 정신분석학에 어떻게 접근했을까’, 이명철 서울대 의과대 교수가 ‘이문호의 서신으로 본 1950년대 한국 의학도의 유럽 유학’을 발표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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