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울부짖는 소리 끊이질 않아…”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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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기록 ‘고대일록’ 완역

‘썩은 나무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걸어 다니는 시체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1593년 1월 1일)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채 끝내 백성을 버리고 도피한 왕과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경남 함양군의 선비였던 고대 정경운(孤臺 鄭慶雲·1556∼?)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난중일기(이순신) 징비록(유성룡)과 달리 임진왜란에 대한 민간의 기록으로 정우락(경북대) 설석규(〃) 오용원 (〃) 한명기(명지대) 신병주 교수(건국대)가 처음 완역했다.

저자는 1592년 4월 23일부터 1609년 10월 7일까지 약 18년간의 일을 적었으며 민간의 기록인 보물 1096호 ‘쇄미록(鎖尾錄)’에 이어 두 번째로 양이 많으며 기록 기간도 두 배에 이른다. 저자는 임진왜란 당시 함양 일대에서 의병장 김성일을 도와 의병을 모집했다.

책에는 관(官)의 간섭으로 인한 의병 모집의 어려움, 왜군의 칼에 맏딸을 잃은 슬픔, 전란으로 몰락한 양반의 모습 등을 상세하게 적었다.

‘본군(本郡)에서 흩어진 병사를 불러 모으니 모두 400여 명이었다. 관군(官…軍)에 속하게 했다. 내가 힘을 다해 군사를 끌어 모아도 관(官)에 소속시킬 수밖에 없으니, 의병(義兵)이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1592년 5월 24일) ‘나는 집에 있는 노비들을 데리고 물건들을 싣고서는 백전(栢田)으로 향했다. 피란하는 사람들로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엎드려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서 끊이지 않았다.’(1593년 7월 5일) ‘나는 과거장(科擧場)으로 들어갔다. 유생들이 겨우 100여 명이었으니, 이제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고 재물도 다했음을 알 수 있다’(1594년 8월 4일) ‘조카가 산에 이르러 정아(貞兒·저자의 딸)의 시신을 찾았다. 머리가 반쯤 잘린 채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1597년 8월 21일)

저자는 또 ‘지부(志夫)를 만나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했다. 두꺼운 얼굴에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1598년 4월 10일)라며 몰락한 양반의 일면을 털어놓았으며, 명나라 군사에게 말을 빼앗기거나 집의 세간을 도둑맞은 일도 기록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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