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맨얼굴’ 20선]<10>예술가의 방

  • 입력 2009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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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방/김지은 지음/서해문집

《빨강 커튼과 하얀 커튼 사이에는 긴 복도가 있는데 거기에도 아주 작은 빨간색 소반 하나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부분에 포인트를 주는 센스가 남다르다. 도록이 놓인 테이블이며 깔끔한 소파는 물론이고, 업소용 냉장고마저 김준의 작업실을 더욱 세련돼 보이게 한다. 거기에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마다 만진다는 여성 가슴 모양의 실리콘이라든가 남자 성기가 드러나 있는 라이터 등 기발한 소품들은 ‘풋’ 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지는 곳

저자가 화가 김준 씨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오브제들이다. 그는 이 오브제들에서 꾸밈없고 장난기 있는 화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솔직함을 감추면 퇴폐적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이 드러내니까 유쾌한 장난이 된다”고 말한다.

작업실은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먹고 자고 꿈꾸는 일상의 공간이다. 아나운서이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예술학을 공부한 저자가 ‘공간’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의도로 예술가의 방을 찾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엮었다.

화가 이동재 씨의 작업실은 경기 양주시에 있는 장흥아트파크에 있다. 작업실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저자가 받은 첫 느낌은 ‘놀라움’이었다. 물감들이 어지럽게 놓인 바닥, 자욱한 담배 연기 같은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아주 밝고 깨끗했으며 창가에는 좁쌀, 팥 등 다양한 잡곡이 담긴 비커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꼼꼼하고 빈틈없는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그의 작업과 잘 어울렸다.

그는 의미와 재료를 연결해 작업을 한다. 콩을 하나하나 붙여서 미스터 빈(Mr. Bean)의 얼굴을 만들고, 쌀로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미국 국무장관을, 현미로 가수 현미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이다.

서울의 한강 근처에 있는 화가 권기수 씨의 작업실은 공간이 제법 커서인지 한기가 으스스 느껴졌다. 작업실에서 저자의 눈에 띈 것은 온도계. 화가의 성격을 대변하는 물건이었다. “추우면 난로 켜고 따뜻하면 그냥 끄면 되는데, 저는 꼭 온도계를 확인하고 불을 켜게 돼요. 약간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조각가 윤석남 씨의 작업실은 경기 수원시에 있다. 그의 안내로 작업실 끝으로 자리를 옮기던 중 책상에 저자의 눈길이 잠시 머문다. 작업에 필요한 사진들과 오래된 영어사전이 놓여 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 작가는 지금도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를 한다. 저자는 “어느 구석에도 게으름의 흔적은 없다”고 말한다.

서울에 있는 카투니스트 김동범 씨의 작업실은 세 평이 될까 말까 한 좁은 공간이다. 그렇게 좁은 곳이 만화책으로 가득하다. 책장 위에는 돼지 두 마리를 그린 카툰이 폭소를 자아낸다. ‘여보, 수고했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막 출산한 돼지 부인의 손을 꼭 잡은 남편 돼지가 두툼한 1만 원짜리 돈다발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돼지 저금통’이 ‘아기(돈다발)’를 낳은 것이다.

저자는 미술가 10인의 작업실에서 각각 개성 넘치는 풍경을 스케치했다. 자신의 공간에서 편한 맘으로 인터뷰를 해서인지 작가들의 이야기는 솔직 담백하다. 요즘 제일 관심 있는 게 무언지를 묻는 질문에 권기수 씨는 ‘돈’을 꼽았다.

“돈이오! 작품이 심오하면 뭐해요? 버틸 수 없으면. 사실 생각하는 작업이 몇 개 있는데 이 공간에서는 소화가 안 돼요. 크기하고 무게 때문에요. 작업이 굉장히 큰 것들, 풍선 작업 같은 것, 철로 만든 것들을 아주 크게 해서 시청 앞 같은 곳에 설치하고 싶은데….”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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