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늙지 않는 ‘나오미족’ 문화 소비의 여왕이 되다

  • 입력 2009년 9월 4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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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창 엄마를 찾을 일곱 살 딸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지난 1박 2일간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건 오로지 ‘위저(Weezer)’뿐.

10대 때부터 좋아했던 미국 록밴드 위저 공연에 흠뻑 빠진 채 딸에게 전화 한 통 한다는 것조차 잊고 놀아버렸다….’ 한 케이블 방송사에 근무하는 이모 씨(32·여)는 장마가 계속되던 7월에 남편과 일곱 살짜리 딸을 집에 남겨둔 채 1박 2일 일정으로 경기 이천에 다녀왔다.

록음악 축제인 ‘지산 록페스티벌’ 공연에 꼭 가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선 이 씨가 10대 시절부터 팬이었던 ‘위저’가 공연을 했다. 》

“시집가서 애 낳고 ‘아줌마’가 된다고 해서 좋아하는 취향까지 늙는 건 아니잖아요. 평소에도 친구들과 함께 예전부터 좋아하던 밴드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위저가 직접 온다니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죠.”

흠뻑 내린 비로 온통 진흙탕이 된 공연장에서도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열창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20대 관객들 못지않았다. 그녀는 말한다. “결혼한 이후에 분명 나보다 아이나 남편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하지만 결혼 전 이미 제가 가지고 있던 라이프스타일까지 모두 버리고 싶진 않아요. 공연을 보거나 책을 사는 데 쓰는 돈을 아끼기는 더욱 싫고요.”

○ 베스트셀러는 그녀들이 만든다

늙지 않는 아주머니, 이른바 ‘나오미족’이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늙어 보이지 않는다’란 의미의 ‘Not Old Image’에서 파생된 이 신조어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소비 및 생활 패턴을 30, 40대 주부가 되어서도 그대로 유지하는 여성을 뜻한다. 2007년 무렵 처음 이 단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엔 ‘젊은 외모’를 유독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당시 나오미족의 대표적인 모델은 김희애, 김남주, 채시라 등 ‘미시 여자 연예인’이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문화 소비 측면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여성 고객층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경제력을 가진 주요 소비 계층이란 인식과 함께 나오미족은 출판, 방송, 패션 등 산업 전반에서 다시 주목받는 중이다.

국내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가 올해 4월 발표한 자료에서도 나오미족의 ‘파워’가 느껴진다. 이 업체가 1년 동안 판매한 책 2400만 권을 분석해 본 결과 30대 여성의 구매 비중이 37.1%로 1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로 책을 많이 산 계층 역시 ‘40대 여성’(15.6%). 남성 구매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온라인 서점임에도 불구하고 ‘30대 남성’은 13.3%로 3위에 그쳤다. 30, 40대 여성들이 사들인 책이 전체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셈이다. 남성에 비해 여성 비중이 높은 시중 서점의 경우 나오미족의 구매 비중이 더욱 높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등 여성들이 찬사를 보냈던 소설 및 에세이류가 눈에 많이 띄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출판 분야에서 ‘여성 파워’는 이미 거의 절대적”이라며 “그중에서도 30, 40대 여성들은 사실상 베스트셀러를 창조해내는 계층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 방송에서 의류까지 전방위 영향력

방송 분야에서도 나오미족의 약진이 눈부시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즐겨보던 드라마 외에 애니메이션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케이블 채널인 온미디어가 5월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성인층’을 조사한 결과 30, 40대 여성의 75.8%가 ‘혼자서도 애니메이션을 시청한다’고 답변했다. 온미디어 측은 “지금도 애니메이션 채널인 ‘투니버스’는 100여 개에 달하는 케이블 채널 중 매번 시청률 3위 안에 든다”며 “그 원동력은 어려서부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난 30대 여성의 힘”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30, 40대 여성들에게 외면받는 프로그램은 지상파와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성공할 수 없을 정도다.

1990년대 ‘닉스’, ‘스톰’ 등 캐주얼 의류에 빠져 학창 시절을 보낸 나오미족은 백화점 의류매장 판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모님들이 애용하는 30, 40대 여성복의 정석 ‘부띠크’ 대신 영캐주얼 의류를 찾고 있기 때문. 덕분에 최근 백화점 여성복 분야에선 부티크보다 영캐주얼이 더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장중호 신세계유통산업연구소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30, 40대 여성들 사이에서 ‘한 살이라도 더’ 젊게 입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기혼 여성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부티끄 의류 매출이 줄어들고 영캐주얼 의류 매출이 늘었다”며 “영캐주얼 의류 인기에 힘입어 아예 영캐주얼 전용 점포를 만드는 유통업체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백화점도 지난달 ‘뉴 어덜트 존’을 따로 만들고 나오미족의 취향에 맞춘 여성복 브랜드를 내놓았다.

○ 우리는 모두 ‘서태지의 아이들’

이들이 제법 나이를 먹은 후에도 20대와 같은 소비문화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아직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뚜렷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현상은 있지만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는 진단이 가장 많았다. 실제 나오미족이 내놓은 나오미족의 존재 이유는 뭘까? 직장인 김유경 씨(35·여)의 생각을 들어 보자.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데뷔했을 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죠. 그 전에도 여러 가수들을 좋아했지만 그만한 충격파는 처음이었습니다. 노래뿐 아니라 의상에서 문화까지 10대 후반 청소년의 모든 가치관을 바꿔버렸어요. 우리 세대는 그 후 90년대가 제공했던 다양한 문화를 발판으로 성장했습니다. 일에 함몰된 지금도 문화 전반에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젊은’ 생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 그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세대는 적어도 생애 한 번은 ‘서태지의 아이들’이었잖아요.”

물론 한가지로 귀결되는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게다. 다만, 이들 나오미족이 1990년대 초반을 휩쓸고 세대론의 한 획을 그었던 ‘X세대’의 2000년대 판 변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변주라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더욱 막강한.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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