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기탁 고문서-유물 10만점… 보존작업 현장 가보니

  • 입력 2009년 8월 13일 02시 59분


■ 한국학중앙硏 문중기탁 고문서-유물 10만점… 보존작업 현장 가보니
바스러진 책 며칠 걸려 한장 복원

《“까맣게 때를 탄 고서(古書)도 여기를 거치면 제 모습을 드러내지요. 이렇게 매일 처리해도 앞으로 10년은 더 걸릴 정도로 많은 고서와 고문서(古文書)가 줄을 서 있습니다.”

10일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층 자료정리실.

신도시에서는 새 건물을 짓느라 분주했지만 이곳의 연구원 3명은 옛 문서들과 씨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1997년 처음 시작한 고문서 수탁 사업. 지금까지 고성 이씨, 경주 손씨, 인동 장씨, 진주 정씨, 반남 박씨, 경주 김씨 등 70여 문중이 10만여 점의 고문서와 유물 등을 기탁했다.》

켜켜이 쌓인 때 습기로 제거
한쪽선 내용 DB작업 분주
세계유일 원나라 법규집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도 다수

○ 고문헌 연구의 첫 출발

장서각 2층 자료정리실에는 까맣게 때가 묻은 책들이 여려 개의 널찍한 탁자 위 곳곳에 쌓여 있었다. 때는 미세한 지우개 가루를 뿌려 지우거나 습기를 이용해 세탁하는 습식청소로 제거한다.

찢어지거나 해진 사료도 복구 대상이다. 가장 신경을 쓰는 작업은 바스러진 책을 복원하는 작업. 퍼즐 맞추기와도 같은 작업은 A4 크기 용지 한 장을 복원하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맞춘 퍼즐은 종이를 덧대 붙이는 배접을 통해 수명을 연장시킨다.

한쪽 모서리에서는 노인환 연구원이 옛 문서의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었다. 그는 “고문서에 나온 내용을 읽고 작성 연도와 내용을 파악해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입력된 자료는 연구원들이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주요 서화와 문서들은 특별히 주문한 중성지로 정성스럽게 종이상자를 만들어 보관한다. 중성지는 산성화를 방지해서 문서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중성지로 가로 100cm, 세로 20cm, 높이 20cm의 상자를 만드는 데 50만 원이 들어간다. 이렇게 보관상자에 담긴 고문서들은 항온항습이 유지되는 수장고에 문중별로 보관된다.

○ 국보 보물 등 가치가 높은 문헌들

장서각의 수장고에는 중국 원나라의 법규집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이 보관돼 있다.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적용된 법규집으로, 장서각 소장본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장서각이 세계기록유산 지정을 추진할 정도로 중요도를 인정받는 이 책은 경주 손씨 문중이 기탁한 책이다.

국보 283호인 ‘통감속편(通鑑續編)’ 등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도 다수 기탁돼 있다. ‘통감속편’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중국 명나라 때 ‘자치통감’의 미흡함을 보충한 책이다.

인동 장씨 여헌종택에서 기탁한 ‘여헌필첩(旅軒筆帖)’은 선조에서 인조 때에 활동한 영남의 대유학자인 장현광이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꾸민 첩이다. 당시 사제 간의 학문적인 대화 내용과 교류 문화를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장현광은 조선조 영남 출신 유학자 5인방에 들 정도의 거물이어서 그의 글씨도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 밖에 순종의 황후인 순명효황후가 자신의 스승에게 보낸 편지 등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문서가 즐비하다.

양반가의 기탁 문서는 왕실문서와 함께 한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된다. 김학수 국학자료조사실장은 “실록을 통해 나라의 정책과 궁중 생활을 알 수 있지만 일반 국민의 삶은 알기가 힘들다”며 “양반가의 기탁문서는 전체 역사 연구에서 보완재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 문중들의 계속되는 고문서 기탁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기탁 의뢰를 받은 10만 점 가운데 현재 보존 작업과 내용 파악 등을 거쳐 정식으로 등록된 것은 3만1500여 점. 나머지 약 7만 점은 등록 대기 중이다. 연구원은 인력과 예산의 한계로 매년 3000∼6000점만 등록할 뿐이다.

기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개별 문중에서 고문서를 보관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풍상에 의해 손실되는 것도 크지만 고문서를 노리는 전문절도단이 벽을 뚫고 고문서를 훔쳐갈 정도로 집요해진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기탁을 하면 장서각에서 해당 문서의 역사적 의미를 연구하기 때문에 선조의 역사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장서각은 기탁받은 문서의 보존처리와 내용 파악이 끝나면 별도의 도록을 만들어 기탁한 문중에 제공한다.

성남=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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