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겹지붕 아래 한국건축 미학 숨쉰다

  • 입력 2009년 7월 29일 02시 59분


충북 영동군 심천역의 전경. 1934년 지어진 이 역사는 지붕 형태 등에서 전형적인 근대 일본 주택 양식을 따랐지만 박공 개수와 위치에 변화를 주는 등 한국 건축의 특징도 숨어 있다. 사진 제공 임석재 교수
충북 영동군 심천역의 전경. 1934년 지어진 이 역사는 지붕 형태 등에서 전형적인 근대 일본 주택 양식을 따랐지만 박공 개수와 위치에 변화를 주는 등 한국 건축의 특징도 숨어 있다. 사진 제공 임석재 교수
뾰족한 지붕 주변 경관과 조화이뤄
日주택양식에 정돈된 구성미 더해
임석재 이대교수 전국 16곳 조사

아스라이 다가드는 완행선 경적에 쫓겨 놓칠세라 훔쳐버렸던 첫 키스의 기억. ‘간이역’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는 그렇게 희뿌연 안개나 진눈깨비에 덮여 있기 쉽다.

“간이역은 많은 이에게 가슴 뭉클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지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효율적 수탈을 위해 지어진 증오의 시설로 해석됩니다. 과도한 서정성과 역사의식을 벗겨내고 건축물로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부 교수(48)는 2007년부터 전국에 산재한 16개 간이역을 찾아가 안개와 진눈깨비를 걷어내며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최근 펴낸 ‘한국의 간이역-수탈과 낭만의 변주곡 사이에서’(인물과사상사)는 낭만과 증오로부터 거리를 두고 건축적 시각에 집중해서 작성한 기행서다.

“간이역이 탁월한 예술성을 가진 건축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전해주죠. 문학작품에서만 접했던 간이역을 직접 촬영하며 들여다본 것은 저도 처음입니다. 작은 건물 한 채 한 채가 품고 있는 건축적 이야기가 풍성해 놀랐습니다.”

전국에 남아 있는 간이역은 40여 개. 대부분 나무 골조에 흙벽을 바른 다음 박공지붕(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씌웠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세월의 흐름을 다르게 얹어 가며 만들어진 것들이니까요. 박공(박공지붕 측면의 삼각형 벽)의 개수와 위치, 지붕 기울기 변화에 모두 건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간이역의 원형은 서구 교외 주택과 근대 일본 주택이다. 임 교수는 디테일의 차이에서 건축적 역사성을 읽는다. 충북 영동군 심천역에는 일본 주택의 특징인 ‘겹지붕’이 도드라진다. 대구 동촌역 지붕에는 서양 주택의 수직 비례가 강조됐다. 경북 문경시 가은역은 불규칙한 창호 분할과 곰살궂은 마감에서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을 드러낸다.

심천역은 일제가 전쟁 준비에 한창이던 1934년 지어졌다. 일제의 표준설계를 충실히 따른 심천역에는 일본인들이 지금도 답사를 온다. 하지만 임 교수는 “심천역 박공의 다채로운 변화는 전형적 일본식 주택에 감춰진 한국 건축의 특징”이라며 “좋고 나쁘고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했다.

통시적 해석뿐 아니라 무심히 스쳐 지나던 허름한 건물 곳곳에서 찾아낸 디테일의 미학도 눈여겨볼 만하다. 간이역 기둥과 지붕에는 간결하게 정돈된 구조 미학이 숨겨져 있다. 전북 익산시 춘포역의 지붕 차양 네 개는 돌출되고 겹친 정도가 불규칙하게 변하면서 절묘한 구성미를 보여준다. 전북 군산시 임피역 지붕에서 빗물을 내려보내는 세로 홈통과 가로 홈통의 연결 부위는 ‘손으로 물건을 움켜잡은 형상’을 하고 있다. 사선으로 단정하게 뻗은 기둥 가새(기둥과 보에 빗겨 덧댄 부재)는 역사 앞 은행나무 줄기와 말없는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근래 새로 지어진 대형 역사 가운데는 콘텍스트를 잃은 국적 불명의 건물이 많죠. 서울 신촌 기차역은 부동산개발 과정에서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처럼 남겨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붕, 기둥, 창호에서 정밀한 선(線)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건물입니다. 공간에 쌓인 시간의 가치를 이어내는 노력이 늘 아쉬워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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