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면서도 화합… 원효 ‘화쟁사상’ 배워야”

  • 입력 2009년 7월 9일 03시 00분


일러스트 김수진 기자
일러스트 김수진 기자
좌우접점 찾는 학자 6人에게 참뜻을 묻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중도(中道) 강화론’을 제기하면서 ‘중도’가 사회적인 화두로 등장했다. 정치권에서는 “서민 출신 대통령의 소통하려는 모습”(한나라당)이라는 평가부터 “포장지 바꾼다고 중도 되는 것 아니다”(민주당)는 논평까지 중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과연 중도의 개념과 실체는 무엇이고, 사회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현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학자 6명에게 중도의 의미를 물었다. 이념적 성향은 다르지만 좌우의 접점을 모색해 온 학자들은 “중도는 주변 상황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정책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현실과 동떨어진 담론에 그칠 수 있다”는 공감대 아래 중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 “한국적 중도는 원효의 화쟁사상”

중도보수 성향의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는 “보수와 진보는 개념 규정이 용이하지만 중도는 그것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생성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담기는 쉽지 않다”며 “이렇게 볼 때 중도 개념은 보수와 진보로부터 성찰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제3자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중도란 사실(팩트)과 합리성에 대한 존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우석 사태’를 비롯해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일들을 보면 전문적인 과학 영역에서조차 민족주의적 이념적 감정을 우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과학자 집단에 의해 승인된 통설을 기반으로 한 팩트가 규준이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대안적 진보를 지향하는 ‘좋은정책포럼’을 이끌며 학계의 보수진영과 교류해 온 임혁백 고려대 교수(한국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인용해 “중우정치(衆愚政治)인 민주주의와 소수 엘리트의 과두제 사이 장점을 취합하는 것이 중도(Golden Mean)”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한국적 중도의 대표적 사례로 신라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사상을 꼽았다. 그는 “‘경쟁하면서도 화합한다’는 화쟁사상과 중도는 통한다”며 “경쟁자를 인정하면서 화합하는 것이 중도”라고 말했다. 또 지도자가 중도를 추구하려면 주위의 이념주의자들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념에 관계없이 천하의 인재를 불러 고견을 듣고 서민과 국민의 이익을 찾아주는 것이 지금 필요한 중도”라는 설명이다.

○ “정책 없는 중도는 허명(虛名)”

황경식 서울대 교수(서양철학)는 “정책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내놓지 않으면 중도는 허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중도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논하려면 반드시 정책적인 검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분배를 중시하는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자다. 그는 중도의 한 사례로 ‘자유론’의 저자이자 현대 자유주의 철학의 대가인 존 롤스를 들고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사회적인 최소 수혜자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중시하는 롤스를 가리켜 미국에서 ‘레프트 리버럴’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중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도가 구체적인 내용을 갖지 못하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종종 그래 온 것처럼 좌우 양쪽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 교수와 더불어 보수진영과의 대화를 모색해 온 진보 성향의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도 “정권이 중도와 실용을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평가해줘야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중도라는 담론에 어떤 정책을 결합하느냐의 문제”라며 “현재 시각에서 중도란 시장의 효율성과 사회적인 형평을 생산적으로 결합하는 데 목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도실용을 내세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양극화를 제어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의 경우 우파 정당이 좌파적 정책을 수용하고 좌파 정당이 우파적 정책을 도입하는 중도 수렴 현상이 대세인데 한국만 이념 간 대립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서구적 개인주의에선 중용 불가능”

중용(中庸)사상을 연구해 온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는 ‘중용’과 ‘논어’ 등에 등장하는 중용의 개념은 서구적인 개인주의를 전제로 해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교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한마음이라는 전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이 중용”이라며 “좌가 한편, 우가 한편이 되면 중도도 또 하나의 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편을 가르면 중도는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진보진영과 교류해 온 보수 성향의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경제학)는 “진보 좌파와 보수 우파가 대한민국 체제와 헌법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 국가발전 방향을 가지고 논의하면 70%는 비슷한 답이 나오는데, 그런 공통점을 취합해 아우르는 것이 중도적 국가 운영”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지도자는 중도를 내세우기 전에 어떤 중도인지를 설명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며 “약자를 배려하는 진정한 보수, 종북(從北) 좌파나 종북 진보가 아닌 합리적 좌파 진보를 끌어안는 것이 중도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中道를 다룬 책들

1998년 출판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의 부제는 ‘사회민주주의의 부활(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 불평등의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념 모델을 제시하며 주목받았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의 교수인 저자가 1994년에 발표한 논문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에 이론적 바탕을 두고 있다.

기든스는 중도 좌파의 입장에서 ‘제3의 길’을 제시했다. ‘제3의 길’을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복원과 성공에 이르는 길로 규정하고, 이를 단순한 좌우 이념의 어정쩡한 타협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현실에 필요한 적극적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를 비롯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유럽 중도좌파 정치가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 책의 이론을 바탕으로 영국 노동당은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 공기업 민영화, 복지 축소 등의 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사상가 윌리엄 제임스가 쓴 ‘실용주의’도 중도 실용주의 사상의 근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저자는 “실용주의는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추상과 불충분함을 멀리하고 구체성과 적실성, 행동과 힘을 향해 나아간다”고 강조했다.

국내 저작물로는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쓴 ‘중도개혁주의 정치철학’이 눈에 띈다. 중도개혁철학에 관한 포괄적 안내서인 이 책은 외국과 국내의 중도개혁주의의 기원과 역사, 현황을 개괄하고 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한 언론인 주섭일 씨의 ‘사회민주주의의 길: 서구 좌우파의 실용주의’도 중도 실용에 관해 참고할 만한 책이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