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한없이 웅크린 일본사회의 초상… 연극 ‘다락방’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5분


《불이 꺼지면 관객은 윗변이 삐딱한 사다리꼴 공간과 마주한다. 사람 한 명이 눕거나 두 명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넓이와 겨우 무릎을 꿇고 앉을 수 있는 높이의 좁은 공간. ‘다락방’이란 이름의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를 위한 1인용 폐쇄공간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일본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日사카테 요지 직접연출

학교에서 집단따돌림(이지메)에 희생돼 어머니 자궁 같은 좁은 공간을 찾는 어린 학생, 어른이 돼서도 자기만의 공간에 집착하는 히키코모리, 특정 장르문화에 심취해 세상만사와 벽을 쌓고 사는 오타쿠, 그런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10대 소녀를 납치 감금하는 인간 사육자들…. ‘일본인들은 토끼장에 산다’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고립과 자폐의 수렁에 빠져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풍자는 급기야 “일본열도 전체가 (국제사회의) 히키코모리가 됐다”는 절규로 이어진다.

200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연극인으로 부상한 사카테 요지 씨의 ‘다락방’은 이처럼 마이크로(micro)한 창을 통해 매크로(macro)한 일본 사회의 일그러진 초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2002년 일본에서 초연된 뒤 사카테 씨에게 요미우리연극상 최우수연출가상을 안겨준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사회적 의미뿐 아니라 연극적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낸 데 있다.

연극은 다락방이란 공간을 고정점으로 삼아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일종의 장르 융합을 펼쳐낸다. 등장인물들 중에는 형사극, 시대극, 전쟁영화란 특정 장르의 드라마에 심취한 오타쿠 동호회 회원들이 등장한다. 다락방은 여기에 공포물과 공상과학물(SF)을 더한 이 모든 장르에 침투해 들어가면서 아이러니 가득한 재미를 선사한다.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천장에 숨은 2명의 사무라이는 말다툼 끝에 칼싸움을 펼치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 칼을 뽑지 못한다. 잠복근무를 위해 다락방에 숨은 2명의 형사는 형사영화를 흉내 내 동전던지기를 통해 심부름할 사람을 정하려 하지만 동전은 계속 같은 면만 나온다. 긴급구난용 산장으로 개조된 다락방으로 피신한 등산객은 거기서 만나 대화를 나눈 여성이 유령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분쟁지역에 파견됐다가 방공창고로 개조된 다락방에 고립된 2명의 비정부기구(NGO) 지뢰제거부대원은 일본 정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없게 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우주인과 접선을 시도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묶은 일본 영화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극적 장치는 100분이란 시간 동안 등받이 없는 객석의 불편함을 잊게 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드라마 오타쿠들이 장동건 주연의 ‘마지막 승부’의 주제곡을 읊조리는 장면은 한국 관객을 위한 서비스다.

축소 지향의 일본식 공간미학과 자기희화화마저 불사하는 일본 특유의 반성문화가 결부된 이 작품의 많은 내용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된다. 치열한 고민이 부족해 갈수록 파편화되고 고립되는 젊은 세대와 그런 젊은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줄 몰라 쩔쩔 매는 부모 세대는 서로의 인간적 체온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 또는 타인이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 한없이 웅크린 고슴도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현실도피와 자폐의 공간인 다락방이 본시 지체부자유자가 된 동생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형의 우애어린 선물이라는 역설적 결론이 더 많은 울림을 낳는다. ‘사카테 요지 페스티벌’의 첫 작품으로 사카테 씨가 직접 연출한 이번 무대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02-889-3561∼2)에서 펼쳐진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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