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몸의 노출? 마음의 누드!

  • 입력 2009년 5월 29일 02시 57분


화가 안창홍 씨 ‘흑백 거울’전

인체 누드에 집중한 전시다. 남녀의 누드가 뒤섞인 전시 공간. 하지만 관능을 자극하는 알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 육체가 아닌, 육체를 지탱하는 내면에 초점을 맞춘 흑백의 누드. 그 속엔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삶의 체취가 짙게 배어있다.

6월 28일까지 서울 사비나미술관(02-736-4371)에서 열리는 화가 안창홍 씨(56)의 ‘흑백 거울: 마치, 유령이나 허깨비들처럼’ 전. 4m에 이르는 누드화부터 얇은 블라우스만 걸친 여인까지 작품 수는 10점에 불과한데 하나하나 그림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그림 속 인물은 직업 모델이 아니다. 화가의 이웃에 살거나 우연히 만나 알게 된,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화가의 열정과 진정성에 마음의 문을 열고 경기 양평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에 와서 옷을 벗는다. 바닥에 물감자국과 붓들이 어지럽게 널린 가운데 그들은 긴 의자에 걸터앉거나 불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과 해석이 담긴 ‘베드 카우치’ 시리즈의 탄생이다. 미술평론가 최태만 씨는 “익명의 개인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평했다.

이 시리즈를 보면 보편적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벗어난 모델이 많다. ‘베드 카우치 5’에 등장하는 손 씨. 화가는 20년 동안 알고 지낸 농부가 맨몸으로 섰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랜 세월, 개간과 수확을 위한 밤낮 없는 노동으로 단백질이 빠져나간 근육과 주름과 굵은 관절들이 마치 숱한 격랑을 겪으며 노년기에 접어든 자연의 장엄함을 보는 듯했다.’ 굵은 힘줄이 돋은 농부의 팔에는 고단한 노동의 시간이 각인돼 있다. 화가는 그 육체를 통해 노동한 몸의 신성함을 드러낸다. ‘베드 카우치 2’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 문신이 새겨진 몸과 정면을 쏘아보는 듯한 강한 눈빛. 세상의 규격에 대한 저항이 엿보인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고통’이라고 말하는 화가. 그는 ‘흑백 거울’에 무엇을 비추고자 한 것일까. “개별적 삶의 역사가 묻어나는 건강하고 따뜻한 육체의 정직성과 존재감에 대한 경의, 가공되지 않은 몸을 통해 아름다움의 본질과 존재의 꿋꿋함을 그려보기로 한 것이다.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수동적 형태가 아니라 관객과 시선을 마주하는 주체로서의 당당함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화가에 따르면, 모델과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누드화를 보고 누구인지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겉’이 아니라, 화가만이 볼 수 있는 ‘속’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몸의 축제가 아니라 삶의 향기에 집중한 전시라 볼 수 있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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