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임진왜란… 나약한 조선의 치부를 들추다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풀어쓴 징비록-류성룡의 재구성/박준호 지음/324쪽·1만3000원·동아시아

“나라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가니, 우리들은 누굴 믿고 살아가야 합니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어가를 본 한 백성이 통곡하며 뱉은 한마디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징비록’에서 임금과 신하의 대화부터 백성의 목소리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징비록’의 징비(懲毖)는 ‘시경(詩經)’의 “내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가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제목에서 류성룡이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이라는 국치(國恥)를 스스로 반성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 속에 드러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참담했다. 일본군의 조총과 용맹성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더 처참했던 점은 당시 지도자들의 대처 능력이었다. 의주까지 후퇴한 선조는 “명나라에 들어가 붙는 것은 본디 나의 뜻이었다”(이항복, ‘백사집’)라고 말할 정도로 위약했다. 평양에서 후퇴할 때는 백성들에게 성을 지킬 거라고 거짓으로 알린 뒤 성을 떠날 정도였다. 전략이 부족하고 통솔권 다툼에 몰두하던 장수들이나 임금의 나약함에 동조하는 대신들도 문제였다. 류성룡은 이를 ‘징비록’에 낱낱이 담았다.

류성룡은 전란 당시 선조가 떠난 평양성을 지키고 명나라 군대를 위한 군량미를 모으는 역할을 수행했다. 민심이 이반한 상태에서 군량미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임금이 나라를 버렸다는 배신감에 백성들은 관청의 창고를 약탈하고 산에 숨어 마을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심각한 열병과 치질을 앓고 있던 류성룡은 “병들어 있으나 죽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는 각오로 이 일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백성을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깨우치고 가르칠 뿐, 한 사람도 나무라지 않았다”(‘징비록’)라고 말하며 급하더라도 민심을 어루만지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자는 ‘징비록’뿐 아니라 ‘서애집’ ‘근폭집’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사료를 인용하고 당시 유물의 사진과 지도를 실어 임진왜란과 류성룡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저자는 “청렴한 삶으로 일관하였던 류성룡은 우리가 희구하는 진정한 역사의 사표”라며 “영웅 부재의 시대에 진정한 영웅을 만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라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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