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공간을 디자인하다

  • 입력 2009년 5월 20일 02시 58분


-故김수근 특별전 ‘빛과 벽돌…’을 계기로 본 그의 작품세계

《건축물이 보여 주는 것은 벽과 바닥, 천장이다.

하지만 사람이 경험하는 건축의 본질은 그것들이 자아내는 공간이다.

한국 현대건축에 처음으로 공간에 대한 고민을 끌어들인 건축가 김수근 씨(1986년 작고)의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전 ‘빛과 벽돌이 짓는 시(詩)’가 26일∼6월 28일 경남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 열린다. 》

건축전문갤러리인 이 미술관에서 벽돌 건축으로 유명한 김 씨의 작품을 조명하기로 한 것. 이번 전시에서 사진으로 선보이는 ‘공간 사옥’ ‘양덕성당’ ‘문예진흥회관’(현 아르코극장)을 중심으로 김 씨의 건축이 현재의 한국건축에 남긴 영향을 후배 건축가들과 함께 돌아봤다.

기와 쓰지 않고도 한국적인 멋 드러내

○ 공간 사옥(1971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김 씨가 세운 설계사무소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검은색 벽돌로 감싸 마감했다. 김 씨가 작고한 뒤 1997년에 유리벽 신관을 증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곳을 한번 찾은 사람은 ‘진입 골목-벽돌 외벽-담쟁이덩굴-비껴 앉은 마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스토리텔링을 잊기 어렵다. 외관과 규모를 정한 뒤 내부를 기계적으로 분할한 사무용 건물이 아닌 것. 김 씨는 건물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며 내부 공간을 그에 맞도록 아기자기하게 구성했다. 높이가 획일적이지 않은 천장, 다양한 폭의 계단이 공간의 연속성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1970년대 초반 공간에서 근무한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63)는 “작업에서 얻은 고민을 통해 성장하는 방법을 후배들에게 일깨워 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김수근 선생은 1965년 부여박물관을 짓고 나서 건축가 경력에 고비를 맞았습니다. ‘일본 유학파답게 왜색(倭色) 짙은 건물을 만든다’는 비판이 빗발쳤죠. 큰 충격을 겪고 나서 ‘현대의 한국적 공간’에 대해 깊이 고민한 끝에 내놓은 답이 공간 사옥입니다.”

김 씨는 이 건물에 기와 등 전통건축 디테일을 쓰지 않고도 한국적인 멋을 드러냈다. 안온하고 그윽한, 사람에게 풍성한 이야기를 건네는 공간 사옥 구석구석의 공간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잘 비우는 건축’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비정형 구도로 세속과 신성 동시표현

○ 양덕성당(1977년)

경남 마산시 양덕2동에 세워진 붉은 벽돌 건물. 기단, 벽체, 지붕에서 고전적인 형식미를 따랐지만 그 모양새가 획일적이지 않고 불규칙하다. 부정형으로 나눈 평면은 제대(祭臺)를 중심으로 관통하는 축으로 묶여져 산만한 느낌이 없다. 사용자가 세속과 신성, 긴장과 편안함을 번갈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1989년까지 공간의 설계실장을 맡았던 이종호 스튜디오메타 대표(52)는 “김수근 하면 붉은 벽돌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마감재를 즐겨 썼느냐는 것은 ‘작은 얘기’입니다. 김 선생은 당시 사용 가능했던 최선의 재료를 선택해 그것이 가진 건축적 가능성을 작품에 반영했어요. 지금은 큰 건물을 짓는 데 붉은 벽돌이 합리적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어받아야 할 것은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부터 시작하는 그의 작업 방식이죠.”

대학로 무게중심 잡아주는 문화공간

○ 문예진흥회관(1977년·현 아르코극장)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3층 높이의 공연장. ‘대학로’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붉은 벽돌 건물이다. 또 다른 김 씨의 작품인 바로 옆 아르코미술관과 함께 마로니에공원을 중정(中庭)처럼 둘러싸고 있다. 공간의 대표이사를 지냈던 승효상 ㈜이로재 대표(57)는 “김 선생의 작품은 건축물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매개가 결국 공간을 비워 놓은 방식에 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지금 세계의 건축 경향은 본질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형태나 표피에 신경을 쓰면서 저마다 도시의 상징이 되려고 경쟁을 벌이죠. 그래도 이 땅에서 건축을 배운 이들은 공간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습관처럼 놓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이 김수근 건축의 깊은 자취를 뚜렷이 보여 주는 유산입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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