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나라, 열녀는 희생양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강명관 교수 새 저서 ‘열녀의 탄생’

“조선, 이데올로기 차원서 정절 강요”

흔히 떠올리는 ‘조선의 여성상’은 열녀(烈女)다. 당시 사회적으로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면 평생을 수절하거나 따라죽고, 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느니 목숨을 끊는 일을 정절(貞節)을 지키는 정도(正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작인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을 통해 조선시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탐구해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사진)는 최근 펴낸 ‘열녀의 탄생’(돌베개)에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열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등장하고 내면화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열녀는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여성의 재혼에 아무런 사회적 규제가 없었다는 것. “고려시대엔 남편을 잃고 재가하지 않는 여성을 일컫는 ‘절부(節婦)’만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절부는 아내를 잃고 결혼하지 않는 남성을 뜻하는 ‘의부(義夫)’와 조응하는 말이었습니다.”

열녀 개념은 국가를 ‘가족의 확대’ 형태로 보는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와 순손(順孫·할아버지를 잘 모시는 손자), 절부와 의부를 각각 한 묶음으로 표창했는데 경국대전에선 의부를 그 대상에서 뺐습니다. 여성이 개가할 경우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고 수절할 경우 수신전(守信田)을 지급하는 등 재가를 금지하고 수절을 장려하는 정책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그가 더욱 주목한 건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열녀편(烈女篇)과 성종 때 펴낸 내훈(內訓) 등을 통한 이데올로기 교육. “중국의 ‘열녀전(列女傳)’과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에 실린 이야기를 편집한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다양한 여성의 사례에서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버리거나 신체를 훼손한 여성들의 얘기만 뽑아 수록했습니다. 내훈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일상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내용이지요.”

그는 제도와 텍스트를 통한 열녀 이데올로기의 보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여성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만큼 내면화됐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441명의 열녀가 왜구의 강간과 납치에 저항해 목숨을 버리고 병자호란 때 청으로 납치됐다 돌아온 여성들이 ‘성적 오염’의 가능성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던 건 건국 이후 200여 년 동안 열녀 이데올로기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 그는 “양란이 끝나고 17세기 중반부터는 혼인제도가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남녀 균분 상속의 관습이 장자를 우대하는 불평등 상속으로 바뀌면서 ‘열녀’를 내세운 가부장제 사회가 완성됐다”고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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